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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아버지 로버트 A.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디 영적각성 120주년을 맞아-

06/05/23       장재웅 목사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아버지 로버트 A.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하디 영적각성 120주년을 맞아-


우물 펌프를 오래 사용하지 않으면 물이 아래로 빠져나가 물을 길을 수가 없다. 그럴 때 물 한바가지를 떠서 펌프에 붓고 펌프질을 하면 밑에 고여있던 물이 관을 타고 올라와 다시 우물의 제 기능을하게 된다. 이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 한다. 한국 교회의 마중물이 된 부흥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분이 있다. 바로 로버트 A.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선교사이다. 한국 이름은 하리영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남부 지방을 관통하는 그랑강 유역에 위치한 세네카에서 태어난 하디선교사는 열살 때인 1875년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가장 유익한 존재가 되라”는 유언을남겼고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의사가 되기로 하고 토론토대학 의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1890년 8월 그는 졸업반이 되어 선교지를 선택할 때 이미 많은 선교사가 들어가 있는 나라보다 방금 문호를 개방해 의사가 필요한 한국에 주저함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캐나다출신 독립선교사로서 부산을 거쳐 1898년 개성, 원산에서 미 남감리회 소속으로 사역을 시작한 하디는 1900년 9월 미 남감리회 윌슨(A.W. Wilson)감독의 권면으로 그해 11월 중국 상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 땅을 밟은 지 10년 만에 토론토대학 선교회소속 평신도 선교사에서 남감리회 소속 신분의 목사로 원산에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안수를 받고 원산에서 열심히 사역을 했지만 결과는 미미했고 기존 교인들에 대한 실망은 이루말할수 없었다. 선교사요 목사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던 중 1903년 8월 원산에서 한국교회의 영적각성의 모멘텀이 된 체험을 하게된다. 그것은 회개와 중생, 성화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 체험이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원산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남여선교사 7명이 연합 사경회를 열고 하디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하디는 말씀앞에서 수치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결점과 부족, 오만과 굳은 마음, 불신을 자백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교회의 회개와 부흥운동의 시작,  곧 영적 각성운동의 출발이 되었다. 

원산교회는 이후 자발적인 헌신으로 매서인으로 불리운 권서(colporteur), 토착 전도인을 세워선교사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산간벽지, 외딴 마을 등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의 불씨가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부흥운동의 열기는 숭실학당, 평양신학교, 남산현교회로 옮겨져 북으로는 선천, 의주, 영변까지, 남으로 개성과 서울을 거쳐 인천, 해주, 공주, 전주, 광주, 대구, 부산까지 확산된 것이다.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평양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 지역과 교파를 넘어 모든 곳에서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장로교회의 길선주, 채정민외 감리교회의 손정도, 이은성과 같은 토착인 목회자와 전도인의 활약이 컸다.  

원산에서 시작해 평양에까지 이른 한국교회는 크게 부흥, 목회자 양성교육의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1907년 가을학기부터 하디선교사는 협성신학교, 피어선신학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서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협성 신학교는 냉천동에 학교 부지와 교사를 마련하면서 명칭을 ‘감리교회협성신학교’로 바꾸고 교육 이념도 새롭게 정했다. 협성신학교는 영적 생활과 정확한 학문연구, 실력있는 전도자 훈련을 추구했다.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전도자 양성이 선학이념이 되었다. 후에 하디선교사는 1913년 6월 1887년 배재학당에서 아펜젤러선교사를 통해 시작된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감리교 신학대학의 3대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러한 신학교 사역외에 하디선교사는 서울 광희문교회, 수표교, 석교교회를 담임했고 1917년부터 감리사까지 겸해 서울 시내(종교, 자교, 수표교, 광희문, 석교), 고양군 7개, 양주군 9개 등 총 21개 교회와 한국인 목회자 25명과 교인 1,600명을 순회하며 사역을 감당했다. 1919년 1월 22일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승하에 이어 3월 1일 독립 만세운동이 터졌던 것이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7명(이필주 김창준 신흥식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이 협성신학교 졸업생이었다.    

하디는 시위현장에서 제자들과 목회자들이 일본군경의 잔혹한 탄합을 받는 것을 보고 총독부에 통치정책전환, 신앙자유허용, 기독교 학교의 교육허용. 선교의 자율성 보장을 선교사들과 함께 강하게 요구하게 되고 부흥운동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함께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디는 고난의 시대를살아가는 한민족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하디는 40년간의 한국 사역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선 안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년이되었습니다. 내 나이 예순 여덟, 이 몸의 뼈와 살은 비록 미국에서 가지고 왔다 할지나 오늘의 주름진 이 몸은 조선 강산의 우로로 자라난 조선의 살이요 뼈올시다. 인생은 짧으나 하나님의 사업은 영원합니다. 나는 오직 조선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 

1930년 10월  3일 냉천동 협성신학교 구내 사택에서 하디의 40년 선교축하 기념식에 참석한 한기자가 “4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하디 선교사는 주저없이 이렇게 말했다. ”다시 조선에 나오겠습니다.“ 하디의 마지막 소원은 ”조선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되는 것“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되는 교회“이었다.  

하디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막내딸(Grace m, Mrs Warner)이 사는 미시건주 랜싱에 거주하면서신학서적 집필에 몰두하다 1949년 6월 30일에 향년 84세를 일기로 랜싱 자택에서 별세했다. 하디의 둘째 사위로 1919년 선교사로 내한해 1934년까지 서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사역한 피셔(E.J. Fisher)박사는 장인의 삶과 사역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하디박사는 경건과 사역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시간을 기도와 성경읽기에 할애했습니다.  자기 삶의 전성기를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봉사하며44년 동안 성자와 같이 살았습니다.그의 삶의 특징을 꼽으라고 하면 그것은 기도와 성경 연구, 열심 사역, 이 3 가지였습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이 말씀과 기도로 시작된 것처럼 신앙의 열기와 생명력을 잃고 침체상태에있는 오늘의 미주 한인교회와 한국교회는 하디 영적각성 120주년을 맞은 올해 “Re-Ad Fontes 다시 근본으로”  하디 선교사를 되새기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금 이 땅에 부흥의 불씨로 타오르기를 소망하며 말씀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말씀이 되는 삶을 살아내야 할것이다. 1936년 2월 하디선교사가 창간한 신학세계 ‘하나님과의 동행’에 나오는 하디의 말이다.  

“ 사람이 씨를 뿌리고 풀을 매면 

   하나님께서 단비와 햇빛을 주셔서 

   들에 곡식이 무르익게 하신다. 

   힘차게 나아가 거친 땅을 개척하라 

   인간의 영광이 여기 있나니” 

 

*참고도서: ‘다시 근원으로’(이덕주교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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