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 July 19, 2024   
“빠삐용”

05/24/24       한준희 목사

“빠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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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보았던 빠삐용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당시 30대 초반에 막 들어서면서 본 영화인데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빠삐용(스티브 맥캔)이란 사람이 요즘 들어 내 머리 속을 맴돈다. 그렇게 자유를 찾아 감옥을 탈출하려는 그 이유가 뭘까, 그냥 그 영화에서 나오는 드가(더스틴 호프만)라는 사람처럼 어차피 죄수가 되어 감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적당히 간수들 비위나 맞추면서 정당히 살면 되었지 뭐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해 가면서 거의 불가능한 탈출을 시도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처음 감옥에 들어온 빠삐용은 달랐다. 자신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온 사람이지 죄를 진 죄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감옥이라는 곳이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하고 무더위와 질병, 끊임없는 구타, 굶주림, 강제 노동 등 인간의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장이다. 끔찍한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견뎌내면서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인식,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의식이 기회만 되면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거의 불가능한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돌아오기를 수 차례 계속하면서 연이은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렇게 늙어버린 빠삐용은 죄수의 무덤이라는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외딴 섬에 버려진다. 여기서도 빠삐용은 아득한 절벽 아래 바닷물을 바라보고 탈출에 대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리고 알아낸 바닷물의 원리, 보통 바닷물은 육지 쪽으로 밀려오지만 때로는 육지의 역방향을 타고 섬 바깥쪽으로 바닷물이 밀려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빠삐용은 코코넛 나뭇잎으로 큰 자루를 만들어 자기 몸을 그 코코넛자루에 매고 절벽 아래 바닷물로 뛰어든다. 결국 빠삐용은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되는 영화이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한 이유는 현실에 대한 막막함과 절망감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 동료목사들과 걷기 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이 운동모임이 특별한 모임은 아니다 또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병들기 딱 맞는 현실, 그리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고독함이 엄습한다는 것, 그 현실을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걷기 모임을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모여 걷고 식사하고 커피 마시면서 웃고 즐기는 시간을 보내면서 느끼는 것은 목사들도 이정도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어쨌든 이렇게 모여 웃고 커피마시면서 즐기는 시간을 행복으로 감사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만족은 하지만 이런 현실을 뛰어넘는 다른 세상은 없을까, 그 생각이 늘 나를 지배한다. 그게 빠삐용을 그려본 것이다.

과연 지금 사는 이 현실 외에 새로운 탈출구는 없는 걸까, 아니 좀더 나은 삶은 없을까, 솔직히 자유를 향해 새로운 세계로 탈출해나간 빠삐용이 되고 싶은 것이 요즘 나의 심정이다.

철모르던 시절, 친구들과 술을 먹고 나이트클럽엘 간 적이 있었다. 술을 먹고 밤새도록 춤을 추고 놀았다. 새벽에 집으로 오는 발걸음에는 허무함과 좌절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겨우 젊음을 만끽한다는 최고의 수준이 술 먹고 밤새도록 춤추고 노는 것이 전부인가, 난 그때도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 사람이 이것 외에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제한되어 있다는데 절망을 하곤 했다. 

결혼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 했고, 가정과 목회 현장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 현실을 만족과 즐거움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야 주어진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현재의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목회가 무너진다. 그게 우리 삶의 한계이다,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빠삐용에서 등장하는 드가라는 사람과 비슷하다, 마음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이 받혀주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에 안주하면서 산다.

어쩌면 벗어날 여유조차 없다. 현실에 주어진 일정이 나를 이끌어간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교회 일을 해야 한다, 경제적 관리, 교회 관리, 등등 벗어날 수 없는 스케쥴이 빡빡하다, 여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스스로 이 테두리 안에서 만족하고 즐기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게 우리들의 한계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런 한계에 갇혀 살아야 하나, 사실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 육신을 벗어 버릴 때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인생사에는 없단 말인가, 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살 수 있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어쩌면 사도바울이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 사람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으로 인해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이 말씀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능할까? 나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마지막 코코넛자루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서 외쳤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난다. “이놈들아,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그리고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빠삐용은 자유를 얻었다, 그는 남은 여생을 자유의 몸으로 살았다. 그 악명 높은 악마의 감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이 세상 앞에 빠삐용은 굴복당하지 않았다고 해석해 본다면 우리들도 이 세상에 굴복당하지 않으면 분명히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지 않나 여겨진다. 그럼 뭘 굴복당하지 말아야 하나,

세상 것들이다. 세상 드라마, 유튜브, 정치 뉴스, 등등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또한 내 미래의 불안, 경제적 두려움, 건강 특히 쾌락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단절하면 된다.

원래 목사는 이런 세상적인 것에 끌려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목사된 것 아닌가. 염세주의나 수도사적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살아보니 뭔가가 조금 보여서 하는 말이다, 목사들이 세상 볼 것 다 보고, 가질 것 다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 다 하면서 주일에 설교 한번 했다고 목사인가, 세상에서 무언가 성별되어 있어야 말씀을 전해도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세상 것들과 단절해 보았다. 

단절해 보니 사람이 단순해짐을 느끼게 되었고 단순해지니 자유롭다는 것도 느껴진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하도 고상해서 세상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이 시대를 탈출한 빠삐용처럼 살아봄이 어떨까 하는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1서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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