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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바운더리

09/10/16       이계자

그리스도인과 바운더리


청소년을 대상으로 사역하던 ‘라이즈 업 무브먼트(Rise Up Movement)’의 대표로 있었던 이 모 목사, 자칫 묻혀 버릴 뻔 했던 그의 추악했던 과거 행적이 12년 만에 피해자의 고백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면서 기독교계는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졌다. 카리스마 넘치는 메시지로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던 그가 2004년부터 무려 4년 동안이나 자신을 따르며 사역에 헌신하던 당시 16세의 여고생 A에게 자신의 지위와 유명세를 이용하여 협박 -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하여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 “내가 원할 때 너를 놓아줄 수 있는 거지 네가 원할 때 떠날 수 없다.” 라는 등 – 을 일삼았고, 그가 쳐놓은 올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린 소녀를 집요하게 불러내어 지속적으로 성폭행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청소년 사역자로서 그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의 권한(영역)은 어디까지였을까?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관심사와 고민에 귀를 기울여 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야 했던 그가 자기에게 허락된 영역을 벗어남으로써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천하보다 더 귀한 어린 영혼을 생명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몰고 간 것이다.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청소년들에게는 술과 담배, 포르노와 같은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살면 안 된다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여 순수하고 순결했던 한 여학생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아 버렸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영역이 아닌 어린 여 제자의 영역에 무단 침입하여 그녀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다.   

오늘날 바운더리가 명백하지 않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일들로 인해 교회의 안과 밖이 혼란스럽고 시끄럽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명예가 실추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거나,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 싶다. 즉, 바운더리에 대한 무지와 이해부족, 또는 아예 바운더리를 세워놓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운더리란 무엇인가? 바운더리(boundary)는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삶의 요소를 명확하게 표시해주는 ‘개인적인 영역 구분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내 것과 남의 것, 내 권리와 남의 권리를 구분하는 경계’다. 옆 집과 우리 집 사이에 둘러쳐 있는 울타리(fence)처럼 말이다. 이것은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우리 집 땅이다’ 라는 일종의 영역 표시로, 누구라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무언의 선포인 것이다.  ‘접근 금지’ ‘직원 전용’ ‘미성년자 출입 금지’ ‘자연보호구역’ 등 셀 수 없이 많은 고유의 영역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게 된 요셉, 그는 주인의 영역과 자신(가정 총무)의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았던 바운더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의 눈짓을 보냈을 때 그는 말(언어)로 분명하게 거절하였고, 또 그녀가 요셉의 옷을 잡고 간청할 때는 자기의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유혹을 피해 달아났다. 그 결과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 했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인생을 살게 하셨다. 이것은 요셉이 자신의 바운더리를 분명히 알았고 끝까지 그것을 지켜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지침을 받았고, 철썩 같이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엄청난 죄를 지었고, 그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들은 ‘원죄(原罪)의 시조’ 라는 부끄러운 이름표를 달아야 했고, 이로 인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고통스런 인생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헨리 크라우드와 존 타운센드는 그들이 함께 쓴 책(Boundaries, No! 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에서 “바운더리의 개념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명확하고 구별된 존재로 드러내며, 당신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지신다. 그분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계획,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등을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인격을 규정하고 그 인격에 대해 책임을 지신다. 그분은 또한 당신이 피조물과 인간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필자 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금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모양(창1:26)’을 주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일정한 범위 속에서 우리에게 인격적인 책임감도 부여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기’를 원하시며 당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생명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처럼 바운더리를 올바르게 설정해 놓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바운더리는 우리가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인간관계 –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 이웃,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 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필수 요소다. 바운더리는 그 어떤 이유나 조건 – 성별, 나이, 지위, 빈부, 권력, 지식의 유무 등 – 에 의해 침해 당해서는 안 되고, 존중 받고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고유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자신의 바운더리를 바로 알고, 지켜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내 허락 없이 내 영역을 침범하여 부당하게 대할 때는 주저하지 말고 분명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만(Stop)!” “아니오(No)!” 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 착한 아들, 착한 딸, 착한 남편, 착한 아내, 착한 친구, 착한 직원 등 – 즉, ‘착한 사람 증후군(신드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느라, 자기 것을 주장하다가 혹시라도 받게 될 불이익이 두려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다가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때론, 그 결과가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에게까지 전염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가? 여러분은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자와 성도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부모와 자녀로서,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서, 교사와 학생으로서, 의사와 환자로서, 상관과 부하로서, 선배와 후배로서, 자신의 영역과 상대의 영역을 바로 알고, 존중해 주고, 보호해 준다면 오늘날의 교회와 사회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바운더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배우고, 바로 세워서, 힘써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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