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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란한 시대에 진실을 생각하다
뉴스와 SNS, 일상 속에서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을 자주 마주합니다. 눈에 띄는 것이 항상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이 때로는 더 쉽게 주목을 받습니다. 최근, 이러한 혼란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며,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상황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중심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고, 그 마음을 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진짜가 가짜에게 밀려나는 세상, 본질이 비본질에게 휘둘리고, 진리가 비 진리에게 고문을 당하는 시대, 정통이 사이비에게 핍박을 받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낯설고도 익숙한 장면은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나타납니다. 원칙을 지키는 이들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 아웃사이더가 되고, 편법과 과장이 능력처럼 포장됩니다. 불법을 행하면서도 당당하고, 무법을 저지르면서도 후안무치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오히려 영향력을 얻습니다. 조용히 정도를 걷는 이들은 묻히고, 과장된 확신과 자극적인 언어와 가짜 뉴스들이 메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가짜는 무슨 일을 해도 요란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조용합니다. 가짜는 사람의 불안을 자극하고, 분노를 부추기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한 문장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빠르게 주목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짜는 다릅니다. 진짜는 시간을 요구하고, 책임을 말하며, 과정을 존중합니다. 함께 세운 원칙을 쉽게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즉각적인 환영의 박수는 받지 못해도, 천천히 신뢰를 쌓아갑니다.
요란함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는 순간, 정직한 이들의 마음에는 깊은 파도가 일어납니다. 안타까움, 속상함, 분노, 설명하기 어려운 답답함까지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실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 기준을 잃지 않았다는 청신호리고 믿습니다. 불의에 둔감해지면 분노도 사라집니다. 거짓에 익숙해지면 속상함도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우리가 여전히 진짜를 알아본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정통은 유행이 아닙니다. 정통은 단순한 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시간과 검증, 책임과 희생 위에 세워진 역사의 발자취이고 신뢰의 축적입니다. 가짜는 흉내 낼 수는 있어도 그 시간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사이비는 모방할 수는 있어도 뿌리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늘 증명해 왔습니다. 가짜가 잠시 요란할지라도, 진짜는 결국 드러납니다. 가만히 있어도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비유하시며, 마지막 추수 때까지 혼동 속에서도 반드시 진짜와 거짓을 가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24~30).
소란은 파도를 일으키지만, 본질은 강물처럼 흐릅니다. 파도는 요란하지만 사라지고, 강물은 조용하지만 사막에도 길을 만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짜의 방식으로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진짜가 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분별하고, 더 책임감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손해처럼 보일지라도 원칙과 기준을 낮추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는 속도가 느리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은 소란이 앞서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은 언제나 본질의 편에 서 있습니다. 결국 기준이 되는 것은 요란함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건너가야 하는가?
가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도 기도는 살아서 역사한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현실을 직면했습니다. 진짜가 밀려나는 듯 보이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서 있어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신앙은 한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방향을 묻습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
첫째, 기준을 다시 붙들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으로, 분위기가 아니라 진리를 기준으로 삼는 일입니다. 다수가 옳아 보이는 순간에도 신앙은 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옳은가?” 하고 말입니다. 기준이 흔들릴 때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원칙과 기준이 서 있을 때에는, 소수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둘째, 흩어진 진짜들이 서로를 발견해야 합니다. 진짜는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조용했을 뿐입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의 신실함을 확인하며, 작은 자리에서부터 건강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역사는 언제나 화려한 다수가 아니라 깨어 있는 소수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가장 약해 보이지만 가장 깊은 힘입니다. 기도는 당장 상황을 뒤집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흥분에서 절제로, 분노에서 분별로, 좌절에서 소망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변화시키는 시작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떠날 수 있습니다. 상처받아 자리를 옮길 수도 있고, 침묵 속에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떠나지 않습니다. 기도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늘에 심겨지는 씨앗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반드시 응답으로, 열매로 드러납니다.
교회의 역사는 웅변가가 아니라 신실하게 엎드리는 기도자들에 의해서 지켜져 왔습니다. 시대마다 이름 없이 무릎 꿇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 올려진 기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장 모든 것을 바로잡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드린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과장된 소란스러움은 사람을 모으지만, 신실한 기도는 시대를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떠날 수 있어도, 기도는 살아서 역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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