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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양(秋陽) 한경직 (1902-2000)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다. 템플턴상 받을 자격이 없다”(3)

08/31/26       김창길 목사

추양(秋陽) 한경직 (1902-2000)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다. 템플턴상 받을 자격이 없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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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양(秋陽) 한경직 (1902-2000)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다. 템플턴상 받을 자격이 없다”(3)

영락교회는 넓고 웅장하게 건축한 석조건물이 아니다. 수천 명이 넘어 수만 명, 십만 명이 넘게 모이는 교인의 수가 아닙니다. 건물과 사람의 수 계산과 유명인 또는 재정이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락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그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목사님의 비전과 영성, 즉 인격이 어떠했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경직은 유교적인 세계에 살면서 13세 때 부모의 권유로 이웃 마을에 사는 연상의 여인 김찬빈과 결혼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신학문에 눈을 뜨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조강지처를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당대의 풍습은 일본과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이 흔히 무식한 나이 많은 본부인을 버리고 새장가 가는 세태였습니다. 학업과 유학과 병으로 사모님과 떨어져 있어도 사모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잘못된 세상 풍조에 따르지 아니하고 다른 식자들과 다른 목사의 이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난 딸은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는 이영헌 교수의 아내가 되었고 아들은 대광고등학교를 졸업 후 미국 유학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쪽 폐만 가지고 사신 목사님은 큰 목회사역이 버거웠지만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우이동에 수양관, 남한산성에 기도처소를 찾아 교우들과 기도하셨습니다. 영락교회 당회도 때론 양론으로 갈라져 갑론을박으로 갈라져 토의할 때도, 논의가 평행으로 달릴 때도, 목사님은 모든 것을 듣고 계시다가 차분하게 오늘은 이만큼 토의하시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한 후에 다음에 모여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 편에도 기울지 않고 평화롭게 만장일치로 모든 결정을 하셨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아 겸허해지는 겁니다. 다수결로 금방 결정하거나, 자기의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하나로 뜻을 모으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다음에 만나 결정합시다"라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연합사업을 할 때도 교단들이 모여 이해와 이익의 견해 차이로 팽팽할 때도 한 목사님은 듣고만 계시다가 마지막 짧은 한마디만 하시면 막혔던 골이 터졌다고들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한 목사님을 찾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작은 목소리로 호소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존경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한번은 영락교회 옆에 있는 중부경찰서가 매물로 연락이 있을 때도 양론이 갈라져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또 정문 건너 LG 건물이 나왔을 때도 놓쳤습니다. 한 목사님은 건물과 땅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기에, 다른 편의 의견을 무시하고 상처 주는 일을 피하셨습니다. 건물 구입을 반대하신 분이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만일 영락교회가 그 건물을 구입했더라면 비좁은 교회가 커져서 얼마나 시원했을까 아쉬워합니다. 영락교회는 장로교 통합 총회 안에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영락교회의 발언은 한국장로교의 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등대입니다.

영락교회를 거쳐가신 홍동근 부목사님은 사회정의를 외치셨고 한경직 목사님의 후임으로 계셨던 구약학 교수 겸 미국 변호사였던 김윤국 목사님, 한 목사님의 음성과 제스처까지 닮았다던 박조준 목사님들에게 교회 안에 부정적인 소리가 있어도 관계없이 품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김운성 목사님은 영락교회 전통과 한경직 목사님의 신앙을 이어가는 목사님입니다. 예수교 장로회가 1959년도 WCC와 NAE 계열로 나누어질 때 한경직 목사님은 많은 오해를 받았지만 꿋꿋이 나아가셨습니다. 반대편에서 신신학자이다, 용공주의자다, 가톨릭과 하나 되고자 한다는 많은 엉뚱한 비난에도 묵묵히 나가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겸손했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Templeton Award 수상자로 연락받았을 때 “나는 그 큰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일제 시 신사참배를 한 죄인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나는 부족하지만 한국교회 부흥과 발전을 보고 주는 상”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상금 102만 불을 모두 북한선교 헌금으로 바쳤습니다. 이후로 신사참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집 한 칸, 없고 돈 한 푼도 없고 양복 한 벌, 모자와 지팡이뿐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청빈하게 오직 목양일념으로,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흠 없이 사셨습니다. 2000년 4월 19일 하늘나라로 가셨으며 4월 24일 예수교 장로회 통합 총회장으로 영락교회당에서 거행하고 영락공원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교단 내의 목사님들, 타교단 목사님들과 대표들, 국가기관 대표, 대학교 총장들과 교수들, 김수환 추기경, 불교 종정, 월주 스님 등이 참석하셨으며 김수환 추기경은 “한경직 목사님은 사랑과 용서의 사도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서거가 방송과 신문을 통해 한 달 동안 계속 알려지자 기독교로 입문한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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