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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에 얽힌 인간관계
작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문득 콩나물국밥이 먹고 싶어 호텔 근처 식당을 찾았다.
오랜만에 혼자 앉아 좋아하던 국밥을 먹고 있는데, 동남아시아에서 온 듯한 외국인 두 사람이 들어와 종업원에게 무언가 주문하려 애쓰고 있었다. 한국말이 서툰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 영어로 묻고 주인에게 주문을 도와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먼저 나오면서 그 외국인 분들의 밥값까지 계산한 뒤 소리 없이 식당을 나섰다. 뒤늦게 사실을 안 외국인들이 뛰어나와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나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나는 왜 아무 연고 없는 그들에게 선뜻 밥값을 내주었을까.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내주고 싶었을 뿐, 다른 까닭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이었을까. 서울 변두리 미아리고개 꼭대기에는 유명한 호떡집이 몇 군데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호떡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미아리고개를 걸어서 넘어갈 때마다 군침만 삼키며 지나치곤 했다. 그런데 어렴풋한 기억 속, 누군가 호떡집 앞에 서 있던 어린 내게 호떡 한 조각을 건네주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외국인에게 밥값을 내주었던 내 행동은, 어쩌면 그 어린 시절에 받았던 고마움과 온기가 무의식중에 발동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얼마 전, 오랫동안 함께 축구를 해온 동료 목사님들을 아침 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의 식사값을 내가 계산하고 나왔다. 내가 돈이 남아돌아서 밥값을 낸 것은 아니다. 돈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더 소중하게 여겼기에 기쁜 마음으로 낸 것이다.
동료 목사님들 중에는 수시로 밥값을 계산하는 분이 계신다. 한두 번도 아니고, 한두 명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다. 매번 적지 않은 금액을 선뜻 지불하곤 한다.
단언컨대 돈이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돈이 많다고 한들 누군가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베풀 수 있을까. 이유는 딱 하나라 생각한다. 돈의 가치보다 목사님들과의 관계라는 가치를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접받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떨까. 한 번 대접받았으니 자신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 20달러의 가치를 받았으니 똑같이 20달러만큼 되돌려주는 것이다. 반면 20달러의 대접을 받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로 갚으려는 분도 있다. 전자가 물질적 가치를 주고받는 관계라면, 후자는 물질 너머의 고마움과 사랑을 받아 더 큰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담겨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러한 ‘주고받는 문화’를 이용해,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부각시키려는 ‘미끼’로 밥값을 내는 사람도 존재한다. 아낌없이 밥값을 내고 선물을 주며 ‘내가 이렇게 베풀었으니 당신도 나에게 당연히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계산이 깔린 선심 제공자들이다.
밥값을 내는 행위 뒤에 숨은 무서운 면모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주 밥값을 내다 보면 대접받는 입장에서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대접을 점차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생긴다. 감사함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보답한다. 비록 자신에게 베푼 사람에게 직접 갚지 못하더라도, 먼 훗날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밥값을 내주듯 마음속의 감사함은 언젠가 또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베풂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대접받는 익숙함에 젖어 감사도, 존경도 잊어버린다. 그저 ‘저 사람은 밥값을 낼 만한 사람, 나는 당연히 대접받아도 되는 사람’으로 자리를 매겨버리는 모습이 무서운 것이다.
관계에는 반드시 건강한 선이 있어야 한다. 명확히 그어 놓지 않은 선은 언제든 쉽게 넘나들게 된다. 기준 없이 밥값을 내기만 한다면 결국 자신도, 사람과의 관계도 아름다운 미덕으로 남겨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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