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ownloadFile: park hyo sook.jpg |

대추 한 알
가을이 깊어지고 나뭇잎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을 때면, 붉게 익은 대추 한 알도 새삼 감탄하며 바라보게 됩니다. 작고 소박한 열매 하나에도 지나온 계절과 견디어 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좋아합니다.
시인은 붉게 익은 대추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저것이 저절로 붉어졌을 리 없다고. 그 작은 열매 안에는 태풍도 몇 개 들어 있고, 천둥과 벼락과 번개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둥글어진 것 역시 저절로 된 일이 아니고, 무서리가 내리는 밤과 뜨거운 땡볕, 초승달이 뜨는 긴 밤을 견디며 그렇게 익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추 한 알도 저절로 붉어지지 않는데, 사람이 어찌 저절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저마다 지나온 태풍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시간, 억울해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이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받아 다시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때도 있고, 아무리 애써도 답이 보이지 않아 “왜 하필 나일까?”, “언제까지일까?” 하고 묻다가 지쳐 버린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문득 뒤를 돌아보면 알게 됩니다. 태풍을 지나며 뿌리가 깊어졌고, 뜨거운 볕을 견디며 스스로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관계에는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지나며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눈물을 흘려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볼 줄 압니다. 외로워 본 사람은 혼자 남겨진 사람 곁에 조용히 앉아 줄 줄 압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이 익어 간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앙 안에서는 고난도 잘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미워도 용서해야 하며, 아파도 괜찮은 척해야 한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 보니 잘 견딘다는 것은 아프지 않은 척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픕니다”, “억울합니다”, “화가 납니다”, “무섭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짜 용기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삶은 태풍을 만나지 않는 길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천둥도 치고 벼락도 떨어집니다. 때로는 한겨울 같은 시간이 찾아오고, 아무리 기다려도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시간과 너무 아파서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도 어느 순간 우리 안에 남아 삶을 바라보는 깊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환난이 곧바로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처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를 쉽게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이었다”고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그 일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상처로만 끝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길어 올리고, 눈물 흘렸던 사람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온 사람의 발자국이 또 다른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시선을 바꾸니 사람들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저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절을 지나왔을까. 저 환한 웃음 뒤에는 몇 번의 눈물이 있었을까. 저 단단함 속에는 몇 번의 무너짐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타인의 이 조금 더 너그럽게 보입니다.
당신은 어떤 태풍을 지나 여기까지 왔나요. 몇 번의 천둥과 벼락, 몇 번의 무서운 밤과 뜨거운 한낮을 지나 지금의 당신이 되었을까요. 그러니 잘 살아오지 못한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지워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주름에도 시간이 들어 있고, 눈물에도 이야기가 있으며, 상처에도 견디어 낸 세월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사이에는 우리를 단단히 붙들어 준 분이 계십니다. 태풍이 고마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처가 필요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태풍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았던 그 분이 있었고, 상처 입은 나를 끝내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고맙습니다.
가을 햇살 아래 붉게 익어가고 있는 대추 한 알을 바라봅니다.
우리 모두도 저절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대추 한 알이 태풍과 땡볕을 온몸으로 견뎌내며 붉고 달콤해지듯, 우리가 흘린 눈물과 상처는 결국 우리를 성숙하게 빚어낼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씩 전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박효숙목사
목회상담학박사/ 뉴저지 공인 가족치료사(LAMFT)
페이팔로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