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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양(秋陽) 한경직 목사(1902-2000)
한국교회 목회자로서 길잡이 (4)
한경직 목사님은 새롭게 신학을 입문하여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모델이 되시고 길잡이가 되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일학교를 다녔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집 앞에 붙여두고 드나들면서 보고 읽고 외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교육과 미션스쿨 교육이 지대한 감동과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션스쿨인 진광소학교, 채플과 성경 시간이 있는 오산중학교, 평양 숭실대학을 졸업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닦으셨습니다. 미국 유학하여 미국 장로교 미션스쿨인 Emporia 대학에서 인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후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목사 예비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분에겐 중요한 멘토가 계셨는데 배위량 선교사와 조만식 선생, 남강 이승훈 교장, 윤하영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주일학교 시절 예수님을 믿게 했고 진광소학교로 인도했으며 오산학교에 들어가 이승훈 교장과 조만식 선생을 만나 신앙과 애국심을 배우고 앞으로의 진로를 상의하였으며 윤하영 목사님은 목사 안수 받는 일과 공산 핍박을 피해 남한으로 피난 가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때마다 한경직 목사님에게 진로를 이끌어주는 어른들이 주위에 계셨습니다. 목회자에게는 한두 사람의 멘토가 있어 함께 의논을 해야 합니다. 한 목사님은 김찬빈 사모님과 나이 차이가 많고 부모님이 결정해준 혼인이었지만 성경의 가르침대로 끝까지 사모님을 사랑하고 이해했습니다. 목회자들의 가정윤리에 표본이 되셨습니다. 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죽음의 고비를 경험했지만 육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육의 건강을 회복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는 회중을 사로잡는 감동과 회심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간결하게 호소하는 설교이며, 간절히 겸손하게 하시는 설교입니다. 교인들은 매 주일마다 다음 설교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영락교회를 개척하시고 교회당을 건축하셨던 목회자입니다. 전쟁 중에서 때론 피난도 하시면서도 전도와 선교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자기 교회 유지에 급급한 시기에도 지교회 세우기, 타국에 해외 선교를 시작하셨습니다. 교회 선교 방법으로 학교와 복지사업을 하셨습니다.
당회나 제직회를 운영하실 때 먼저 주님의 뜻이 무엇이고 교인들의 의견을 고려하시고 한 목사님은 모든 결정이 민주식대로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기도하시며 기다려주는 목회였습니다. 때론 안타깝게도 생각하는 대로 안 될 때도, 양보하며 교인들이 열심히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모이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수고 없이, 양보 없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1977년경 캐나다 토론토에 토론토한인장로교회 부흥회 인도차 오셨습니다. 당시 토론토에는 군사독재 반대와 친북 세력이 있었습니다. 친북 매스컴은 한경직 목사님에 대해 군사정권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성명을 내고 항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북미에서 한국 군사정권을 비난하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토론토연합교회에 시무하는 사위 이상철 목사님의 집에 거하셨습니다. 매스컴들은 같은 Princeton 신학교 출신 목사님을 만나게 하여 성토를 하겠다고 난리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김재준 목사님은 Bloor St에 있는 Korea House에서 토론토한인장로교회 담임 박희민 목사와 연합교회 담임 이상철 목사님과 일반 손님을 받지 않고 연석해 만났습니다. 점심을 나누면서 큰 문제가 제기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 우리 둘이는 같은 Princeton 신학교 출신이지만 주님은 나에게 교회를 통한 선교사역 소명을 주셨고 김재준 목사에게는 사회정의를 위한 사명을 주셨는데 우린 같은 목사로서 사역의 길이 다를 뿐입니다 하고 웃으며 헤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겸손하게 즐겁게 만남을 마무리했습니다. 동포들은 모두 다 우려했던 두 분의 만남을 거룩한 목사님들의 만남이었다고 칭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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