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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크리스천의 단어가 아니다.
오래전 대한민국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북한이 공산화가 된 후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서 남한으로 피난 왔다. 당시 5세도 안 된 필자도 부모님을 따라서 고향 평안북도 선천에 모든 아름다운 것을 뒤로 놓고 서울을 향해 떠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1년간 기다리다가 어느 날 밤 해주 앞바다를 건넜다. 다른 난민들과 같이 필자는 그때 안내인의 목마를 타고 남쪽에 거의 다 왔는데 예기치 않았던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물이 그렇게 빨리 들어오는 것을 처음 봤다. 남쪽에서 던져준 로프를 받아 살아났고 난민촌에서 1년을 기다려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6.25를 경험하고 1.4 후퇴 때 대구로 가서 살았다. 서울에서 의과대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다가 70년대 초 미국에 왔다. 필자의 친정어머니는 친가는 모두 이북에 남았는데 서울에 내려올 때 잠깐 만나고 그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우리 집에서 외가 이야기는 금기였다. 어머니가 우셨기 때문이다.
필자의 나이면 다들 그렇겠지만 어려서 6.25 동란을 경험했고 그 후 뉴스와 책과 영화, 문서들을 통하여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필자에게 있어 공산주의나 그들의 사상이나 행동을 생각하는 것은 끔찍하다. 생각하기에도 두려운 모습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공산화된 후나 수복 후나 서로 다른 모습의 상처 주는 고통을 보았다. 소위 좌파, 우파로 부르는 것이다. 그 후유증들이 남아 아직도 자손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을 신문을 통해 듣는다.
필자는 제주도 4.3 사건의 피해자였던 가족 한 분을 안다. 그분은 어린 5살 때 부모 형제, 양가 친인척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아서 고아로 떠돌면서 살다가 미국까지 오게 되었다. 크리스천임에도 그분은 늘 긴장하고 감정 처리를 잘 못해 갑자기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배우자에게 분풀이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분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필자가 병원의 휄로우였을 때 나치 집단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충격으로 병이 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모든 식구를 개스실에서 잃고 구제된 리아를 만났다. 그녀는 저의 근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같이 했었다.
필자가 처음 “좌(파), 우(파)”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아 질문했을 때 놀랐고 소름이 끼쳤다. 필자 같이 공산화가 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피난 오고 다시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이에게 이들 정치적 단어는 듣기에 불편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러한 언급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크리스천이 무엇인가?
크리스천이 된다 함은 주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태어남을 경험하면 자신의 과거 모습이 아닌 새로운 생각과 모습을 가지게 되면서 차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변화된 크리스천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모습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많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사랑이나 용서뿐 아니라 그에게 다가온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구별하지 않은 것이었다. 인종이나, 신분, 나이나 성별에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를 받아주신 평등 자체였다. 갈라디아 3장 27, 28절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모두는 주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차별은 크리스천 됨을 방해하는 인자이다. “차별을 허용한다”, “차별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깨뜨린 차별의 벽을 다시 쌓는 것과 같다. 크리스천이라는 새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 과거의 차별했던 행동이나 공평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허물어뜨린 차별의 벽을 다시 쌓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허물어뜨린 차별의 벽은 신뢰와 믿음의 벽으로 쌓아야 한다. 그동안 인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의 신뢰를 허물고 믿음을 잃게 된 죄를 죄질렀다. 그리스도와 나, 나와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차별은 그리스도가 무너뜨린 벽을 다시 쌓는 것과 같다.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대립하면 다시 벽을 쌓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대립, 판단, 신뢰의 상실, 차별 같은 모습이 크리스천의 모습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바라건대 주님이 무너뜨린 차별의 성벽을 다시 쌓는 잘못을 저지르고 주님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모습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고 필자가 어려서 경험한 피난, 난민의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고후 5:17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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