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마음
얼마 전 우리 교회 권사님 댁에서 꽃모종을 얻어 가지고 와서 뒤뜰에 옮겨다 심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 지지대를 만들어 주고, 거름도 올려주고, 아침저녁 물을 주면서 “예뻐라, 예뻐라, 어서 어서 자라거라.”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더니 쑥쑥 키도 커지고, 살도 오르고, 제법 튼튼해졌습니다.
바쁜 시간 틈틈이 시간을 내어 농사를 짓다보면 어린 시절, 강릉 비행장에서 공군으로 순직하신 친정아버님이 불쑥 그리워집니다.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계신, 나의 아버지! 유월 육일 현충일을 지내며 얼마나 가슴 저리게 보고 싶은지.
친정아버님은 저녁에 부대에서 돌아오시면 앞마당에 상추랑 근대, 고추랑 호박 등을 심어놓으신 밭으로 가셔서 취미삼아 밭을 일구시고, 알뜰히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아버님이 퇴근하실 즈음, 앞마당이 흥건하도록 푸성귀에 물을 묻혀놓으면 아버님은 손으로 엄지 척을 하시며,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주시며 좋아하셨습니다.
퇴근 후, 가벼운 반주 한잔에 피로가 풀리시고, 기분이 좋아지시면 “우리 가족이 전부 몇 명이지? 내가 우리 부대에서 제일 부자야! 자, 번호!” 하시면, 우리 5명의 형제자매들은 “1!, 2!, 3!, 4!, 5!.” 큰 소리로 자기 번호를 외쳤습니다. 흐뭇해하시는 아버님의 너털웃음이 때로는 귀찮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까, 학교에서 숙제로 시험지를 주었습니다. 거의 다 풀고, 잘 모르는 문제가 있어서 아버지께 여쭤보았습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나에게는 척척박사였고,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시더니 글쎄, 2번 같은데 하시며 시험지를 돌려주셨습니다. 다음날 시험지를 채점하는데 답은 3번이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던지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몰라서 틀린 것도 아니고, 아버지께 물어봐서 쓴 답이 틀리다니.
아버지가 무능력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참고서도 못 사주는 아버지. 학원 한번 안보내주는 아버지가 너무 작아보였습니다. 한참 동안을 삐쳐서 말도 안하고 지냈습니다. 점점 집에서 말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심부름을 시켜도 듣지 않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일을 일부러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영웅처럼 믿던 어린 나에겐 사소한 그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엄청난 마음의 재난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답이 맞았다고 백점이 되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 마음이 비뚤어져버렸습니다. “다시는 아버지께 답을 물어보지 않으리라” 그렇게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뒤틀린 내게 아버지는 끊임없는 사랑을 보내셨습니다. 엄마 몰래 모은 용돈을 가방에 넣어주시며, 필요할 때 쓰라고 하시며 “공부하느라 힘들지?” 하시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셨습니다.
사춘기를 지나고 안정되어 갈 즈음에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일로 순직하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듣게 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달려오면서 ‘천붕’ 바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울고 불고, 지쳐서 자다가 일어나 또 울고, 기력이 쇠해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정신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리라” 아버지는 제게 스스로 답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철부지였던 아버지의 딸이 세월을 보내며 이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세월도 사람을 키우나 봅니다. 이제야 삶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힘겨운 세상을 살아내느라 버거웠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에게 능력자처럼 보였던 아버지도 위로와 위안이 필요한 평범한 남자였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자식에게 참고서도 못 사주셨던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무거운 짐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제 철이 드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늘상 업어주시던 아버지의 등이 그리워집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아버지의 따뜻한 등.
지금 선 자리에서 바라본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나에겐 한 분 밖에 없는 너무나 멋지고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열심을 다해 일과 가족을 사랑하셨고, 맡겨진 삶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그 사랑이 지금 모습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귀함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족함을 통해 결핍동기를 가르치셨고, 작은 실망을 통해 적절한 좌절 경험을 하게 하셨으며, 일치된 사랑으로 자식들을 잘 돌보셨습니다.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눈을 맞추시며 ‘예뻐라’ 하시며, 든든해하시던 아버지의 눈빛이 오늘의 모습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인생에서 틈틈이 잡초를 뽑아주셨고, 약을 쳐주셨던 나의 아버지, 언제나 지지대가 되어주셨고, 몸소 거름이 되어주셨으며, 최고가 되기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인생에서 더욱 중요함을 실천하셨던 나의 아버지. 인생의 풍파와 모진 세월을 보내면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못 다한 효도를,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최고가 아니어도 편안할 수 있는 행복한 일상을 유산으로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나의 아버지! 사랑합니다!
박효숙교수
가정사역자/목회상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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