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내가 좋아하는 자매님이 있었다.
교회에서 만난 그녀를 나는 무척 좋아했기에 결혼까지 꿈꾸며, 그녀를 만나는 주일이 되면 약간에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만큼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교회에서 만나면 일상적인 평범한 교회 이야기 외에는 그 이상에 어떤 대화도 진행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 자매가 퇴근하는 길목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나의 기대만큼 그녀는 나를 그렇게 반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그게 몹시 서운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짝사랑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무렵 나를 많이 좋아하는 장로님 딸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주일학교 학생으로 그 자매를 가르쳤으니 나와 꽤 나이 차이가 나지만 내가 30의 나이를 훌쩍 넘긴 시점에는 그녀는 족히 결혼을 할 나이가 된 처녀가 된 것이었다. 그 자매가 매주일 오빠오빠 하면서 나를 쫓아다녔다.
장로님도 노골적으로 두 사람이 잘해서 결혼을 하라고 귀뜸을 주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난 그 자매가 싫었다, 그냥 교회에서 만난 동생 정도로밖에는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자매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하다, 좋아하는 사람은 멀리가고 싫어하는 사람은 가까이 온다. 이 묘한 관계가 60이 넘은 내 일생에 연속적으로 전재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목사가 있다. 늘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에 부담감도 없고 친근감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자주 만나기를 원하고 만나 이야기를 하기 원한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큼 그 목사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분은 내가 전화하기 전에는 결단코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다, 반드시 내가 접근해야 그때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나를 불러주기 원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가까이 와 주기를 바라는데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꼭 내가 가까이 해야 만날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늘 아쉽고 답답하다.
반면에 나에게 매일 전화하는 목사가 있다, 점심때만 되면 불러서 식사를 산다, 일주일에 몇 번 식사를 사면 부담이 되어 나도 한번을 사야한다 그 한번 사는 점심값도 나는 솔직히 싫다. 하지만 몇 번씩 대접을 받고 뒷짐 지고 있기에는 늘 부담이 되어 만나기가 꺼려진다, 그래도 모르는체 할 수가 없어 부르면 만나게 된다. 만나는 그날은 기본적으로 2시간은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점심을 대접받았으니 그 댓가로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느낌도 들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이 싫다. 때로는 백화점에 같이 가면 뭐 와이셔츠도 사주고 잠바도 사준다, 나를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목사가 싫다, 싫은 사람과 만나는 것도 가면 갈수록 싫어진다, 자꾸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
이런 묘한 관계가 교회 안에서도 있다. 교회에서 내가 좋아하는 교인이 있다. 그 교인은 교회 구 석구석 그분에 손이 안 미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정말 일 잘하고, 충성하는 교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충성하는 것에 비해 그분은 나를 썩 좋아하는 것같지 않다. 늘 가까이 가면 피한다, 친해지고 싶어서 카톡을 보내도 별로 반가운 반응이 없다. 그냥 목사로만 대하지 그 이상 그 어떤 친근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반면 유달리 나를 좋아하는 교인이 있다, 늘 앉아도 옆에 앉으려하고, 먼저 와서 인사하고, 말도 먼저 붙이고, 카톡을 보내면서 오늘 설교가 너무 은혜스러웠다고 과분할 정도로 글을 써 올린다, 그런 그가 좋아져야 하는데 나는 그런게 싫다,
교인들끼리도 그렇다, 좋아하는 교인들끼리 모이고 싫어하는 교인들을 피해 끼리끼리 식사를 한다. 세상이나 교회 안이나 똑같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멀리하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좋아한다, 이 미묘한 관계 때문에 때로는 딜레마에 빠진 적도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오랜 기도 끝에 얻은 응답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 관계도 사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 관계도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만남이 있고 좋아짐에 관계 형성이 되는 것이지 내가 좋아한다고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한다고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사람과의 사귐은 나의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해 주셔야 사귐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결국 사람을 대하는 기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면 좋은 사람, 싫은 사람으로 편가르기를 한다. 그러하기에 사람은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사람을 대 해야지 그것이 상실되면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다보니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서 편가르기 인생을 사는 미묘한 사람관계만 만들뿐이다 .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대할 때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의 기준은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본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보자. 그것이 목회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더 더욱 느껴지는 요즘이다.
*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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