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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는 모처럼 의미있는 3주간의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1주동안 보훈처의 해외독립 유공자자녀 초청프로그램 덕분에 국립현충원을 비롯한 국내의 여러기념관을 돌아 보았고,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니 개인적으로 독특한 경험을 갖게되었다. 그 후에는 1주간 베트남을 방문하게 되었고 오늘 쓰는 글은 베트남에서 깨달았던 이야기이다.
베트남에 처음 갔을때 눈길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가 독특한 건물의 형태였다. 방문했던 다낭에서 보았는데 알아보니 다른 도시에서도 동일하다고 한다. 서민들의 주거 건물의 형태가 직육면체의 성냥곽들을 좁고 긴 옆면이 앞으로 보이도록 일렬로 세워놓은 것 같이 보였다. 여행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가로 4미터 세로 11내지 20미터의 대지를 정부에서 50년간 대여해 주고 그 후 원하면 다시 50년간 대여해 준다고 하니 그저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공간이 없이 서로 바짝 붙어있고 건물의 형태가 그렇게 되니 보통 건물의 측면에는 창문이 없다. 건물과 그 옆 건물의 사이가 떨어져 있는 집도 측면에는 대부분 창문을 내지 않은 것을 볼수 있다. 심지어는 미완성 건물처럼 건물의 앞 뒷면에만 페인트칠을 하고 측면은 회색의 시멘트벽 그대로 방치한 집도 간혹 눈에 띈다.
짐작해 보면 그 건물 옆에 다른 건축물이 들어설 것을 예상해서 칠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반면에 건물의 앞면은 화려한 난간과 기둥을 세우고 창문과 벽도 아름다운 색깔로 칠을 하는가 하면 앞마당에는 꽃이 핀 화분들을 놓아 집을 장식하기도 한다. 대도시와 중소도시를 막론하고 집주인의 빈부에 의하여 장식 모양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로 4미터의 원칙은 동일하게 지켜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약 가이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토지정책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폐단 중 하나가 천정부지로 뛰는 부동산 가격이며 이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서울에사는 사람들은 벌어들인 소득을 한푼도 안쓰고 10년동안 고스란히 모으기만 해야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소득을 고려할 때 서울 집값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나 영국 런던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3일 한국은행이 KB국민은행의 주택 가격 동향조사를 인용해 분석한 결과, 지난해 3분기 기준 서울에서 연간 가처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10.3배로나타났다. 이는 서울에사는 가계가 벌어들인 소득을 하나도 쓰지않고 10년을 모아야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계 주요도시 수치를 보면 LA는 9.3배, 런던은 8.5배로 서울보다 낮았고, 호주 시드니(12.2배)와 캐나다 벤쿠버(11.8배)는 서울보다 조금 높았다. 하나도 쓰지 않고 십년을 모아야 한다는 의미는 집을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효과를 본다고 하나 금수저 부모를 두지 않은 자녀들에게 결혼과 내집 마련은 그야말로 불가능하고 정규직 직업을 갖는 것 또한 쉽지 않으니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 대신에 1인가구가 늘어나며 그에 따라 유아 출산율이 절벽을 치는 것이다.
서울에 머물던 호텔의 갖은 힘든 일과 남대문상가의 새벽시장을 깨우는 조그만 점포의 주인들과 일정 중 참석했던 강남의 화려한 결혼식장에서 모든 허드레일까지 도맡아하던 한국의 젊은이들의 얼굴이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필자가 고교를 졸업했던 1973년도 당시에는 일정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잡고 승진하며 돈을 모아 집을 사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었으며 개천에서 용이난다’는 이야기도 인정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세상은 이제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했으며 이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거대한 부(富)를 움켜쥐고 현대사회의 정글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힘 앞에 요사이 젊은이들은 2job, 3job을 뛰면서도 옥탑방과 고시원과 반지하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며 그들의 젊음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의 금권(金權)의 권세는 일반사회 뿐만이 아니라 현재 한국교회도 잠식해가고 있는 중이다. 필자가 둘러본 서울과 부산의 거대한 교회당과 웅장한 부속 건물들에게서는 골고다에서 피흘리시던 예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에 관해서 성경은 무어라고 하는가?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요셉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모두 자기 조상 지파의 종족 되는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전하게 되어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들의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니라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종족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남아 있었더라.(민 36장 5절 - 13절)”
모세를 통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순종을 통해 그들의 종족 지파에 그들의 기업이 순수하게 남게 되는 장면이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대사(大事)는 우리 신앙이 시험을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결혼보다 자신들의 종족 지파에 대한 기업이 우선시 되었으며 당장의 경제적인 손익이 아니라 장차 다가올 기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하여 영적 공동체의 건강하고 거룩한 순수성을 지켰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기업의 거룩하고 순수함을 염려하는 요셉 자손의 종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과 같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교회 대지의 가격이 오름에 따라, 혹은 출석교인과 재정수입의 증가에 따라 교만함도 올라가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만 남아있는가?
2job, 3job에 시달려 교회 출석도 등한시 하게되며 기복주의와 샤머니즘과 삼박자 구원이 주종을 이루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아픔을 아프다고 호소할 수도 없어 교회를 등지는 젊은이들에게 슬로브핫의 딸들과 같은 순수한 믿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말의 풍년 한 가운데서 안타까움만 느끼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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