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저주의 산물인가? 노동을 인간 타락의 결과로 여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 평생 수고해야 소산을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 3:17-19)
이 구절을 통해 그들은 노동이 타락의 결과고 노동은 저주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과연 그러한가?
인간 타락은 땅의 저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이 수고한 만큼 땅이 소출을 내지 못하는 그 참담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노동을 저주의 결과로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은 인간 타락 전 이미 에덴동산에서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여기서 “경작하다”는 히브리어로 ‘아바드’고, ‘봉사하다’, ‘노동하다’, ‘보살피다’, ‘섬기게 하다’와 같은 다양한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인간 타락 전, 에덴 동산은 땀 흘리는 노동 없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유지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경작과 보존이라는 노동이 필요한 현장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명령하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것은 피조세계를 보존하고 관리하고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이다.
따라서 땀 흘려 노동하는 것은 저주가 아닌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대한 인간의 당연한 응답인 셈이다.
땀 흘려 노동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에서 인간은 정의에 근거한 공정사회를 꿈꿀 수 있다. 땀 흘리지 않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려고 하는 이들을 우리는 ‘불한당’이라 한다. 불한당이 많은 사회는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세계화운동이라든가 2011년 뉴욕에서 일어난 월가점령운동은 이러한 불한당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로 촉발되었다.
월 가는 전 세계 금융자본의 중심을 상징한다. 월가점령운동은 부를 독점하고 있는 1% 금융자본가들이 절대다수의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적시하였다.
이 시위는 전 세계 1500여 개 도시로 확산되어 노동하지 않고서도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는 불한당을 고발하였고 그들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권력에 저항하였다.
최대 이윤 추구만을 위해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살아가는 욕망 추동 인구가 전 세계 부의 불균형과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과거에 비해 노동 가치를 존중하고 노동자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실제로 빈익빈 부익부는 더 심화되었고 부의 불균형에 따른 차별은 더 교묘하고 광범위해졌다.
올해로 노동절은 127주년을 맞이하였다. 노동절이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과 단결의 날로 정착하게 된 것은 1886년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 쟁취 파업투쟁에서 연유한다.
시카고 노동자들의 투쟁 이전 1884년 5월 1일, 미국 방직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하였고 각 노조가 이에 호응하여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1886년 5월 1일 시카고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조합연합회'를 중심으로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을 요구하는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미국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으로 시작된 운동이 전 세계 노동절의 효시가 된다. 미국 노동운동의 여파로 각국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1890년 5월 1일 제1회 메이데이(노동절) 대회를 치렀다.
정작 미국은 사회주의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노동절을 9월 첫째 주 월요일로 바꿔 그 투쟁의 의미를 희석시켜 버렸다. 노동자들이 흘린 땀이 자본주의와 세계 발전의 동력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매년 노동절을 맞이하지만 많은 이들은 노동과 직업이 신성하다는 사상의 유래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유래했음을 모르고 있다.
독일 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의 노동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 직업소명설과 자본주의 발전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았다.
베버에 따르면 루터는 직업을 세속적 의무 수행을 위해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보았지만 그의 직업관은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경제적 전통주의로 복귀하고 말았다. 이러한 루터의 직업관을 비판한 베버는 오히려 칼뱅이 루터의 직업관을 계승하고 그의 전통주의적 관점을 일소하여 근대적 직업 관념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베버의 주장대로 노동을 존중하고 게으름과 시간의 낭비를 비판하고 검약의 중요성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사유재산과 소유의 불평등을 인정하였고 부의 편재와 상공업을 옹호했다.
칼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게으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손발을 주었고 산업을 주었기 때문이다.”
칼뱅의 게으름에 대한 질타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바울은 임박한 종말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노동을 기피한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칼뱅에 따르면 노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삶을 추구한 칼뱅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할당된 짧은 삶의 시간을 볼 때 우리는 나태 속에 빈둥빈둥 지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정해준 제도라고 주장한다. 현대인들이 칼뱅의 노동윤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노동과 직업의 신적 기원에만 있지 않다. 노동의 공적 차원을 강조한 칼뱅의 사상은 불한당이 부를 독점하는 현대사회에 다시 공명 되어야 한다.
칼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하나님께 한 일로 간주한다. 그에 따르면 노동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 행위다. 따라서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리는 것이고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이 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노동은 필히 공동체 유익과 이웃 돌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칼뱅은 말한다. “삶의 어떤 형태도 인간 사회에 유익을 주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더 찬양 받을 만 한 것이 없다.” 그는 계속 주장한다. “하나님은 다만 전체 사회에 유익하고 이바지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보여주는 직업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이 노동이기에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 또한 그 은총이 주는 선물이 된다. 그는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응당 지급해야만 하는 임금을 체불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행위라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교회에서도 늘 논쟁되는 구원과 행위의 관계를 칼뱅의 노동 윤리의 관점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
중세 신학에서는 행위와 구원이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당시 인간은 행위를 수단으로 하여 구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구원과 행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보았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고 그 결과로 선한 삶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응답이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칼뱅의 노동윤리에는 자본주의적인 면과 사회주의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 그는 사유제산제와 상공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인정하였지만 사회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공립학교를 세워 가난한 가정의 아동들에게 무료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평등사회를 지향했다.
칼뱅의 노동관은 중세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로 나가게 한 동력이 되었고 이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위한 발판을 제공했다. 땀 흘리지 않고 거대자본을 독점하는 금융 자본가들이 판치는 세계와 이윤 추구에 혈안이 되어 공적 윤리를 점점 잃어가는 현대사회는 칼뱅의 노동관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어디 사회뿐인가? 자신의 직업을 성직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이웃을 섬기지도 않은 성도들과 자신만을 성직자라고 가르치며 교회를 또 다른 계급사회로 만드는 목회자들도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한참 멀다.
이웃을 돕는 청지기라는 직업윤리와 공동체를 돌보는 노동을 가르친 칼뱅의 사상을 이제 교회부터 다시 붙잡아야 한다. 세상을 섬기는 거룩한 공동체로 교회가 회복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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