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작은 분노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그리스도인은 화가 낫다 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에베소서4:26절)고 권면한다. "분을 내어라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말라, 해가 너의 분 위에 지지 않도록 하라" 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바울은 사람이 어떤 온당치 못한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갖게 되는 감정적 흥분 즉 희노애락에 대한 감정을 갖거나 표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벵겔은“분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만일 어떤 이유로 인하여 분노가 일어날 때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니 얼굴색이 변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들 가운데서 동생을 쳐 죽인다. 이것이 분노가 저지른 최초의 죄악이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썩은 세상의 무법천지 가운데서 선택 받은 사람,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사람, 방주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물을 바친 사람,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분노함으로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기를 거절하고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학대 받는 길을 걸었고 이집트 재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모욕과 장차 받을 상을 선택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살면서 세 번 분노하였다. 청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서 궁궐에 있을 때 히브리 백성들을 애굽인이 때리는 모습을 보고 민족적 의분으로 애굽인을 쳐서 죽였다. 두 번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고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오는데 황금 우상을 만들어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민 모세가 십계명 석판을 던졌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하였다. 정의로운 의분이었지만 십계명을 부수는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목말라 죽는다고 원망할 때 분노한 결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게 된다. 모세의 삶을 볼 때 성경의 가르침은 분노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인 것이다.
제이 E. 아담스는 우리가 분을 낼 때 죄를 짓는 분노가 있고 죄를 짓지 않는 분노가 있음을 말한다. 즉 죄를 짓는 분노는 자신과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파괴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정서 혹은 감정의 분노로서 폭발하든 내면화하든 모두 죄가 되는 불의한 분노이며,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분노는 의로운 분노로 구분한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도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행하는 자들에게 한정되어야 하며 항상 절제와 자제력이 요구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마하트마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분노한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비폭력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게 한 지도자들이다.
킹은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 아래서 자라 보스톤 대학에서 신학과 변증학을 공부하여 Ph. D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몽고메리 알라바마로 돌아가 목회하던 중 하버드 대학의 총장인 존슨이 “인도는 단 한 발의 총탄도 쏘지 않고 해방되었는데 그것은 간디의 무저항 운동의 덕택이고, 그의 비폭력주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천민계급을 사회구조 속에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간디 자신이 모범적인 성자적인 생활이 가능한 했던 것은 비폭력적인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다는 강연에 감명을 받아 비폭력 운동을 하게 되었다.
킹은 “비폭력의 순례”라는 강연에서 “나는 전의 어느 때보다 십자가야말로 사회적 개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한다”고 하면서 “사도 바울같이 겸손히 그러나 자랑스럽게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고 가노라“라며 비폭력 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지난 2017년 8월 11-12일 버지니아 주 샬럿츠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대규모 폭력 시위에 맞서 열린 인종차별 반대시위에 시위대에 돌진한 차량으로 인해 한 명이 숨지고 19명 이상이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 차별과 출신 등으로 인한 테러나 폭력과 증오의 피가 이 땅을 다시 적시는 범죄 행위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인종차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종이나 자유인이, 흑인이나 백임의 차가 없기 때문이다”(갈3:28). 그리스도인은 인종차별적 폭력에 저항하고 예수의 끝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에는 죄를 짓는 행동을 하거나 혈기나 악독, 폭언이나 폭행 같은 적대적 행동이나 성질을 부리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분노가 속에 쌓일 때 자신 속에 있는 분노의 모습을 부인하기도 하고, 부인의 방어기재가 깊어지면 분노가 격노로 혹은 살인에 이르는 병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하기를 속히 하여 어리석은 일을 행하지 않아야”한다. 다윗은 시37:8절에도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하였다.
의분이라도 불의를 행한 사람들의 불의를 교정하는데 그치고 계속해서 품고 살아서는 안 된다. 야고보 사도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고 하였다. 아울러 예수께서는”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고(마 5:22), 바울은 성내는 것과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들을 육체의 일로 벗어버려야 할 일들로(갈 5:20, 골 3:8) 가르친다. 또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여야 하며, 감독들에게는 ‘급히 분을 내어서는 안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 분노를 표현하되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더 궁극적으로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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