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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우리의 과제

10/03/17       유기천목사

종교개혁과 우리의 과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들어가며

1517년 10월 31일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비텐베르크 대학교 성당의 문에 수도사요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95개의 논제theses를 붙이며,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타락한 교권에 대항하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말이 종교개혁이지 사실상 개혁의 범위는 광범이 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윽고 유럽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고 사회변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그러나, 5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를 돌아볼 때 그 당시 못지 않게 더 많은 개혁의 과제가 있음이 보게 된다.  조국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기보다 비판의 대상이 된 형국이고,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미국 땅에서의 한국교회 또한 이민 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자의 문제 해결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종교개혁의 선구자 루터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며 체계화시켰던 칼빈을 종교개혁으로 이끌었던 것은 전통이 아닌, ‘말씀의 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성령을 통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육신이 되게 했다. 또한, 종교개혁의 가장 큰 혜택은 사제의 손에 있던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 준 것이다. 요컨대, 종교개혁은 말씀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바꾼 이야기다. 오백 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단지 구호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가 살아나고 은혜와 믿음의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작금의 상황: 말씀의 부재와 천박한 신앙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이고, 목회자의 문제는 강단의 문제다. 강단은 두말할 것 없이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어야 하는 자리다. 최근에 한국과 미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회적 이슈들에 기독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상이다. 특히 카톡 같은 사회적 관계망을 통하여 이슈에 대응하거나 동참하는 모습에서 기독인들의 의식 수준을 어느 정도 엿보게 한다. 그런데, 가짜 뉴스를 보고도 전혀 건전한 비판이나 분별력 없이 퍼서 나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들 중에 교회 중직자도 있고,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한국 교회나 이민 교회의 수준을 드러내 보인다 하겠다. 그런 분별력이 없고, 어느 한쪽에 당장 줄을 서야 하는 강박증을 가진 것처럼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혀 다른 쪽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직자들을 보면, 오랜 시간 교회에 다니면서 무슨 말씀을 듣고 배웠을 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그런 목회자들을 보면 바른 신학이 전혀 내면화 되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진정, 말씀 중심의 사고가 하나님 중심의 사고인데 말씀이 경험이나 상식에도 쉽게 자리를 내어주고 지연이나 혈연 등에는 꼬리를 감추고 이해 관계가 걸릴 때는 종적을 감추고 마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한계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여전히 사회적 관계망을 통하여 주고 받는 내용 속에는 베리칩이니, 666이니, 금 모으기 등과 같은 이야기가 긴급성을 가지고 돌아 다닌다. 이런 우리 시대의 교회를 보면서 바른 말씀의 선포 및 바른 신학 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우리가 아는 대로 수도사이자 교수였지만 그도 또한 16세기라는 시대의 아들이었다. 그 시대의 아들답게 ‘공로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로마서의 주제이기도 한 ‘하나님의 의’God’s Righteousness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는 순간 그의 인생의 돌파구가 열렸고 천국에 바로 들어오는 기쁨을 받았고 한다. 그는 이 기쁨을 가지고 복음에 나타난 ‘그 의’를 바로 선포하고자 했고 거기서 이신칭의의 신학이 나왔고 그 말씀과 그 신학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다. 그럼 그가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신학

로마서 1장 17절은 로마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계시되었고[나타났고], 거기에 나타난 ‘의’가 오로지 믿음으로 우리 안에 전가(imputation)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인생의 돌파구(a breakthrough)를 열어주었던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가 아니라 분노가 일어났다고 한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롭지 않고 불의한 자를 다루는 일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심판하신 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여전히 불안하고 분노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밖에(outside of us) 있는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의 피로 말미암아 불의한 우리에게 전가되어 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전가는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오로지 믿음이다. 인간의 공로나 의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믿음으로 받은 사람은 의로운 자로 간주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의롭게 된 자는 ‘믿음’이 삶과 존재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근거한 의의 전가는 루터의 인생에 혁명을 불러왔고 그 안에서 일어난 혁명은 종교개혁의 불씨와 동력이 되었다. 또한 그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 아들의 복음이며 루터가 말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이다. 여기서 우리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시대의 공로주의를 배격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은혜라는 사실과, 돈이 우상이 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의 방식이 ‘오직 믿음’이어야 함을 배워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언약공동체라는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 그리고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종교개혁도 말씀으로 돌아갈 때 이루어졌다. 요시야 왕은 유다가 국운이 쇠해 가는 시기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성전을 수리하며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를 재건하는 일에 착수하며, 율법책(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발견된 율법책을 제사장 힐기야가 왕 앞에서 읽을 때에 그는 옷을 찢고 회개한다. 그리고 말씀을 백성들이 모두 듣게 하여 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찾고 우상을 타파하며 새로운 영적 질서의 회복의 길이 열렸다. 여기서 진정한 종교개혁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의 뜻에 삶의 방향을 재설정 reset하는 것임을 보게 한다.

종교개혁 오백 주 년을 목전에 두고, 세계화의 고통, 고용의 불안, 부의 양극화 및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나날이 더해지고 심리적 불안이 가중되는 때에,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가 새로움을 입고 복음으로 사회를 치유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길과 치유책은 시대를 초월하여 말씀 밖에 없다. 이 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우리가 먼저 그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며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곧, 말씀이 말씀이 되게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다.

또한, 요시야 때에 이루어진 종교 개혁은 바른 말씀의 선포와 함께 언약 공동체라는 정체성 회복이었다.  루터를 움직이게 했던 로마서 1장 17절 역시 복음에 나타난 ‘의’ 또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NT Wright)

나가며

그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한 언약 백성이다. 이 언약의 백성은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요 그가 세운 교회에 분명한 계획을 펼쳐 보이셨고 그 계획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다. 그 비전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처럼, 그 아들 역시 우리를 이 땅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사명자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결론은, 교회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그가 주신 말씀이며,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며 세상을 치유하며 이 땅을 고쳐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것도 말씀이다. 종교 개혁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는 이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여전히 통치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왕임을 다시 한 번 천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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