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주일
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救主)라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 또 그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0문: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聖人)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로마서의 구조를 따라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2부는 구속(救贖, redemption)에 대하여 3부는 감사(gratitude)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요리문답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삼위일체론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독론적인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를 주도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구속 redemption 사역의 중심에 있다. 물론 성령은 성화sanctification를 주도한다.
1.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21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Ιησούς라는 이름은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 여호수아יהושע나 예수아ישוע와 의미의 헬라식 이름이며 구원자라는 의미다. 구원자 예수는 인생의 가장 큰 문제요 인생이 스스로 결단코 풀 수 없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을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길’the Way이 되고자 이 땅에 구주Savior로 온 것이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죄의 행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 그 이상이 있다. 죄의 뿌리나 영역에서의 자유나 해방으로 더 넓은 이해가 필요 하다. 골로새서 1:12,13에서“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 에서는 흑암의 권세를 ‘the domain of darkness’로 번역했다. 그러니깐 어떤 세력이 역사하는 공간과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조직적이고 만연한 죄의 문화가 있다. 우리의 생각과 관습이 젖어 있었던 곳이다. 우리의 본성[sinful nature]이 자연스럽게 숨쉬던 공간이다. 그렇다, 우리가 죄를 되풀이 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곳이며 우리는 거기서 영원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하나님은 그 사망의 웅덩이에서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의 나라kingdom로 우리를 옮기신 거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하여 다스리는 나라다. 그러니깐 우리가 구원자 예수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단지 우리의 죄의 용서함을 받는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영역(domain, realm)으로 편입한 것을 말한다. 그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완성이 되지 않아 여전히 긴장 속에 놓여 있지만 그 나라로 옮겨진 백성은 그 나라의 전진과 확장을 위해서 경주해야 한다. 물론 성령 안에서 그 나라를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2. 유일한 구주 예수.
“종교는 다 같고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거나 “교회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이런 식의 고백은 하는 되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남의 사건이 없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고백이 없으면 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사도행전 4:12에“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라는 이름 외에는 구원을 베풀 자가 없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예수 만이 유일한 중보자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3. 말과 행위에서 예수를 고백해야 한다. 예수는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거나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 없이 토정비결을 보고 점쟁이의 말이 궁금해서 점쟁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말과 행동이 따로 가는 고백은 심각한 혼합주의syncretism로 귀결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결국 여호와 신앙을 말하면서 바알 신앙Baalism을 물리치지 못하고 타협한 결과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실용주의Pragmatism가 대세인 듯 하다. 인간의 복지나 편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실용주의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하다. 실용적 사고에서는 돈이 신이고 권력과 명예가 힘이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진리는 예수가 믿는 자의 주인(Lord)이요 왕(King)이다. 진정으로 그를 왕으로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거짓이다. 따라서 실용주의 역시 혼합주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요컨대, 진정한 신앙은 예수가 나를 죄에서 건져 주신 분이요 사탄의 권세[영역,domain]에서 건져 주셨다는 고백 뿐 아니라 예수를 나의 삶의 주인이요 내가 속한 나라의 왕으로 인정하며 그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이 진실로 구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페이팔로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