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주 친하게 지냈던 동창 친구 목사가 한국에서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귀한 친구를 잃은 슬픔이 컸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니까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작년, 난 우연치 않게 그 친구 목사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갓 신학교를 졸업한 아들과 세 딸이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위로 겸, 몇 분의 동기 목사님들과 함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돌아가신 목사님의 서재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벌써 3년이 지났는데 목사님이 쓰던 책상이 그대로 있고, 책꽂이에 책들, 각종 상패 및 임명장, 목사님이 입었던 목사 가운, 각종 사진들이 빽빽하게 서재를 가득 채운 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사모님께서 하시는 말이 아직도 남편 목사님이 살아 계신 것 같아서 도저히 버리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이렇게라도 버리지 않고 있으니까 마음에 위안이 된다고 했다. 죽은 지 3년이 지났는데 유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모님의 마음이 이해는 되지만 뭔가 좀 께름칙한 느낌이라 할까,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와서 나는 내 책상을 보면서 내가 죽으면 이 많은 책들, 온갖 잡동사니들을 내 아내가 그대로 간직할까? 다 필요 없을 물건들인데…. 그런데 책상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나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32년 전 서울 올림픽 때 홍보 운영요원으로 지내면서 간직하게 된 신분증, 뱃지, 올림픽 개폐회식 입장권, 당시에 쓰던 수첩, 벨트, 넥타이 등 별별 것들을 다 쌓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을까? 내 자신에게 물어 보고 싶다. 아마 그때의 영광이 내 인생에 가장 기쁨이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때의 그 자랑스러움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지금까지 그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는 것 아닌가 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난 오래전부터 메모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약 30여 년 가까이 메모한 수첩들이 아직도 종이 상자 안에 남아 있다. 그것도 버리지 못한다. 또한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던 일기장도 보관하고 있다.
왜 버리지 못할까?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옛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좋았던 시절이 재현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것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을까?
이런 모습이 나만 그런 걸까? 많은 분들이 과거에 쓰던 물건을 보물단지 모시듯 30, 40년 보관하고 계신 분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바로 나라는 존재를 상실하고 싶지 않은 자기 애착에서부터 이런 버리지 못하는 의식들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식, 그것을 과거에 썼던 물건으로 확인해 놓고 싶은 심리적 발동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런 것이 어찌 물건들뿐이겠는가? 과거에 다녔던 명문대학교의 졸업장, 박사학위, 과거에 잘 나갔던 기업체 사장, 회장이었다는 자부심, 과거에 받은 표창장, 과거에 박수를 받았던 자기 달란트, 과거에 벌어놓았던 돈, 한국에 사 둔 땅…. 어쩌면 우린 모든 것을 과거에 것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보다. 과거의 모든 것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미래를 향해 갈 수가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웠다.
오직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가야 한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과거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미래의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진리를 나는 알았다. 버리면 앞으로 주어질 것들은 버린 것에 수 십 배의 은혜로 채워진다는 이 비밀은 아는 사람만 안다.
제1인생이었던 삶이 세상적 삶이었다면 그 세상 삶을 버렸을 때 제 2인생인 목사가 되었다. 제 2인생이었던 목사의 삶을 내려놓으면 100세 시대에 채워져야 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제3의 인생으로 바꿔진다는 믿음이 나에게는 확고하게 서있다. 그래서 흥분된다, 제3의 인생이….
빈 공간, 빈 상자, 빈 마음이 되면 분명히 새로운 것들이 채워진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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