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네 했는데 주말이 될 때마다 참 세월 빠르다 했는데,
2020년 1월이네 했는데 벌써 12월이 되어 버렸네,
어! 하는 순간, 일년이 휙 가버렸고
아니, 했는데 벌써 인생 황혼 길에 서 있네
내가 급하게 달려온 건지
세월이 빨리 간 건지
아니면 인생이 짧은 것인지
나도 모르는 게 세월인가 보네,
미상의 작가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아니, 벌써! 12월! 마지막 한 장의 12월 달력을 보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20년을 뒤돌아본다.
어찌보면 2020년 1월 1일부터 하루하루가 다 종말론적인 하루였다는 것을 실감한다.
2020년 1월 31일은 올해 나에게 돌아오질 않을 마지막 달이라고 여겼는데 2월이라는 소망이 나를 반겨주었고 2월이 마지막인가 했는데 3월이 나를 반겨 주었다, 3월이 4월이 5월이 아니 12월이 마지막 인가 싶은데 2021년 1월이 있기에 또 소망을 걸어 본다.
마치 떨어지지 않은 마지막 입새처럼 하루라는 입새는 떨어지지 않고 계속 내방 창문 밖에서 나를 향해 뭔가 메시지를 던지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12월이다.
마지막 잎새!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존시는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본인도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존시는 담장에 있는 담쟁이 덩굴잎을 보면서 그 잎이 모두 떨어진다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소식을 원로화가 베어먼이 알게 된다. 오랫동안 걸작품 하나 남기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베어먼은 존시가 덩굴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을 터무니없는 낭설로 일축해 버린다. 며칠 후, 비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담쟁이 잎은 모두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마지막 한 장은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다. 저 잎새가 떨어지면 나는 죽겠지, 며칠동안 비바람은 계속되었다, 존시는 마지막 담쟁이 잎새도 떨어져 버렸을 것으로 여기고 날이 밝아오는 창문 밖을 보니 그 마지막 잎새는 그대로 달려 있다. 존시는 그 마지막 잎새가 마치 자기인양 비바람에도 달려 있는 잎새처럼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잎은 베어먼이 담장에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고 존시는 완치된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이 일년 열두 달이, 즉 2020년이 인간이 그려 논 마지막 잎새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잎새처럼,.. 떨어지지 않는 하루하루는 2021년 1월 새해로 이어진다,
사람이 만들어 논 12월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또 새해에다 소망을 걸어본다. 어쩌면 그림에 지나지 않는 허상인 숫자에 우리는 소망을 걸기도 하고 새로운 결심도 하기도 한다. 아니 이 허상인 숫자에 낙심과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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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달력이 그려 논 허상이라면, 걸어 논 12월 달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두가 이 365일이라는 허상의 숫자에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젊었다고도 하고 늙었다고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사람이 만든 제도, 사람이 만든 형식, 사람이 만든 그림 안에서 살아 왔던가, 마치 불치의 병도 완치되는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도 안에서, 형식과 그림 안에서 사는가 보다. 아니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소망을 주고 사람을 살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았다.
법도 제도도 형식도 다 일시적인 것들이다. 그런 일시적인 것들이 없는 창문 밖 저 세상을 나는 보았다. 그 저 세상은 우리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세상이고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고 가장 완벽한 세상이 아니던가,
비록 12월이란 시간 안에서 살지만 나는 사람이 그려낸 마지막 잎새로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소망을 갖는다.
올해 2020년 새해가 시작될 때, 나는 인생에 큰 소망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 소망은 60여년의 세월동안 나를 속였다, 허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허상의 2021년에는 나는 소망을 걸지 않겠다. 나의 소망은 오직 예수뿐이다, 그분이 내 인생의 12월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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