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 또 키가 작은 사람, 큰 사람. 몸이 뚱뚱한 사람, 홀쭉한 사람 등. 사람은 같은 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도 똑 같지는 않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런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미리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00% 수동적인 태어남이다. 부모에 의해 태어난 인간이다. 평등(平等)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다.
평등이란 사람의 키를 모두 똑같이 만드는 게 평등이 아니다. 키가 큰 사람은 큰 데로, 작은 사람은 작은 데로 그대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 평등이다. 평등은 곧 자연스러움에서 시작된다. 만물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움이다. 이 또한 평등이다. 태어남과 죽음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평등이다.
<장자>의 외편 중 ‘변무’편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물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 다리를 길게 이어지면 괴로워한다.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 다리를 짧게 잘라주면 슬퍼한다. 때문에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부터 짧은 것은 이어 주어도 안 된다. 생겨난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 자연스레 살아가게 그냥 두란 뜻이다.
이렇듯, 평등이란 본성을 소중히 여기어 주는 데 있다. 본성(本性‧nature)이란 개별 존재가 가지고 있는 성품 또는 성질을 말하며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전엔 “본성이란 사람의 경우 본디부터 타고난 성질, 즉 천성(天性)을 의미하며 사물이나 자연현상에서는 원래부터 있던 특성을 뜻 한다”고 되어 있다.
본성이 있나 하면 개성도 있다. 개성(個性)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성품이다. 육체적으로 말한다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얼굴 등의 신체 조건이 될 것이고 마음으로 친다면 서로 다른 품성이 될 거다. 이처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배려해 주는 마음과 행동이 평등이요 공평함이라 할 수 있겠다.
가끔 한국 TV방송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그룹(girl group)들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어쩌면 얼굴이 그렇게 똑같을 정도로 생겼을까. 전부 고대 미인 서시(西施)를 담게 만든 인형과도 같다. 서시는 기원전 5세기,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4대 미녀 중 한명으로 그녀를 본 물고기도 넋을 잃었다는 얘기도 있다.
개성이 곧 평등인데, 걸 그룹의 얼굴엔 개성이 없다. 왜냐하면 성형수술을 통해 똑같이 만들어진 인형들을 보는 것 같기에 그렇다. 이렇게 만들어진 얼굴은 외모지상주의를 대표한다. 요즘 일부 여성들은 얼굴만이 아니다. 작은 가슴에 실리콘을 넣어 부풀게 만드는 등 자연스런 곳은 찾아 볼 수 없게 만든다.
예뻐지려고 하는 마음을 탓할 수는 없지만 왜 생긴 그대로, 자연스런 모습 그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걸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이것도 인간의 본성중 하나이기에 그런 걸까. 이제는 여성뿐만 아니고 남자들도 성형수술을 한다. 한국의 남자 탤런트 중에도 성형수술을 했음이 밝혀지곤 한다. 그래서 미남이 된다.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이 여섯 발가락을 갖고 태어났다. 신발을 신으면 티어 나온 발가락 때문에 상처가 생기고 물집이 생겨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 하늘이 내린 고통일까. 그래서 어머니도 여동생도 여섯째 발가락을 수술해 잘라내 버렸다. 그때부터 고통은 사라졌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하는 성형수술은 누가 뭐라 말할 수 있겠나.
하늘은 참으로 평등하고 공평한 것 같다. 금수저로 태어났든 흑수저로 태어났든, 키가 크든 작든, 부자든 가난하든, 잘났든 못났든, 배웠든 못 배웠든, 눈이 파랗든 까맣든, 세상을 하직하는 죽음에 있어서만은 모두에게 공평무사히 행사되니 그렇다. 죽음은 자연스런 네이쳐(nature)현상으로 죽음의 문은 우주의 품안에 안기는 관문이 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고 받아들이는 것이 평등이다. 두루미와 오리의 다리처럼, 천성과 본성을 소중히 여김이 평등이다. 서시를 닮으려는 외모지상주의,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형제와 형제, 친구와 친구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틀림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움이요 평등이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모든 생명체를 평등하게, 모두 고유의 본성과 품성을 주셨다. 조물주께서 허락한 이런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아닐지. 나와 남의 의견이 다름이 평등이다. 의견이 다르다고 적을 만드는 행동은 치졸함 그 자체다. 다름 안에서 보편성을 찾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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