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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22      이제니

한국환상곡과 안익태 (1)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예술가에게는 국경이 있다.”

 

안익태의 생애와 예술은 이 한마디 속에 다 담겨있다.

“세계 각국의 청중들은 나를 환영하는데 왜? 나의 조국은 어찌하여 나를 냉대하는가?” 이렇게 마지막 탄식을 쏟으며 고국을 떠나 머나먼 스페인 땅에서 1965년 9월 17일 쓸쓸히 운명했다.

그 순간 전세계는 경악했다. TV가 없던 시절 영국 BBC 방송은 12시 정오 뉴스에 긴급방송을 전했다. 

“방금 전 세계적 지휘의 거장 안익태가 서거하였습니다. 큰 별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다시는 진정한 정통 베토벤을 듣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라는 방송 보도였다.

스페인 정부는 3일동안 정부 관공서에 조기를 계양했고 각 방송사에서는 조가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위대한 거목이 쓰러졌을 때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은 우리 가슴에 진정한 용기와 단결을 일깨워 준 안익태의 참 뜻과 참 모습을 이해하고 보살펴 주지 못했고 오히려 일부인들은 시기와 질투심으로 그의 공적을 뭉게 버렸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우리 대한민국 민족의 발자취와 수난을 엮어 한편의 역사를 그린 대서사시이다. 고요한 아침 찬란히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 세계를 향하여 끝없이 헤쳐나가는 검푸른 바다, 반만년 역사 위에 한민족의 기상이 용솟음치는 아침의 나라, 찬란하고 아름다운 나의 조국, 금수강산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봄의 정경과 추수한 기쁨을 나누는 농부들의 흥겨운 가락소리... 그러나 일제 침략과 야욕 한일합방, 이어지는 탄압 그리고 항거, 계속되는 독립운동과 3.1운동. 어려운 민족의 고난 속에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6.25 전쟁과 남북분단의 아픔, 찢어지는 가난, 굶주림과 어려움 속에서 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를 모아 조국의 번영과 영광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한국환상곡! 끝 부분의 합창은 우리의 염원이요, 민족의 절규요, 간절한 기도요, 소망이다.

조국이 일제에 합방을 당하여 우리 민족이 희망을 잃고 있을 때 뜻한 바 있어 그는 음악예술의 세계를 향해 달려갔고 마침내 세계 거장으로 우뚝 섰다. 그는 그가 염원한 뜻대로 한국환상곡을 통하여 우리민족의 기상과 혼과 얼을 세계 만방에 알렸다.

안익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암울할 때 그 해 12월 5일 평양부 계운에서 태어났다. 도산 안창호, 의사 안중근 등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순흥 안씨 집안 안덕훈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1918년 평양숭실학교 중학부에 입학, 교장 선생 마우리 선교사에게서 투철한 기독교신앙과 민족의식을 배웠다. 안익태가 특별히 음악에 뛰어난 소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마우리 박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다. 특히 주일에 교회 성가연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보냈는데 안익태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즐겁고 귀중한 시간이었다.

하루는 민족관과 신앙이 투철한 숭실중 8명이 친일파 앞잡이 선생과 3.1운동에 가담했다가 평양감옥에 갇힌 동포들을 구출하려고 숲속 언덕에서 모의하다 발각됐다. 이들을 쫓아오는 일본순사를 필사적으로 피해 교장 사택으로 도망간 안익태는 얼굴과 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이를 본 마우리 박사가 급히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시켰다.

마우리 박사는 평양에서는 일본순사들이 안익태를 불순분자로 지목하고 특별 감시를 하고 있어  더 이상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여 경찰서장을 만나 자신의 보증 속에 일본의 본거지인 동경으로 유학 보낸다.

1926년 동경음악대학에 입학한 안익태는 어김없이 꼭 여름방학 때에는 서울 종로 YMCA 강당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의 주도로 귀향 첼로 독주회를 개최하였다. 말이 음악회였지 실은 동포들을 모아놓고 음악을 통해 민족의 얼과 혼을 일깨워 주는 사상 고취 집회였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펜젤러 교장의 후원으로 이화, 배재학당 학생들을 위한 정동교회에서 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곡목 중에는 매번 우리나라 애국가 곡은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을 의무적으로 넣었다.

감시가 심한 일본순사들은 이 곡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리고 연주회가 끝나면 다시 평양으로 고당 조만식 선생이 기다리고 있는 평양 YMCA강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했다.

훗날 안익태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혼과 투철한 애국정신은 고당 조만식 선생과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인격과 애국심을 보고 배워 일평생 삶에 지표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일본 동경음악 유학시절 더욱 더 일본순사들의 감시가 심해져 그는 미국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한다. 필라델피아 음대와 커티스 음악학원에 입학한 그는 뛰어난 재질에 필라델피아 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인 스토코프스키에 발탁이 되어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

음악대학을 졸업할 당시 뉴욕에서의 작곡 콩쿨에 한국환상곡이 입선되었다. 콩쿨 규정에 따라 작곡자가 직접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휘대에 올라선 안익태는 뉴욕 카네기홀 뉴욕 필하모닉 단원들을 쳐다보며 싸인을 보내고 지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단원들은 지휘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잡담만 하고 있었다. 순간 안익태는 ‘동양인이라 깔보는구나’ 지휘가 시작되었는데도 소리는 내지않고 심지어 킥킥 웃는 단원들. 그는 견딜 수 없는 지휘자의 굴욕감과 모멸감 도저히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안익태는 지휘봉을 꺾고 내려왔다. 

“먼 훗날 내가 다시 뉴욕필을 지휘할 때 거장이 된 나의 모습을 너희들이 보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는 정통 음악 본거지인 독일로 건너가 다시 도전해 볼 것을 결심한다.

독일에 도착한 안익태는 1936년 6월, 그 날도 일본의 탄압과 헐벗고 굶주린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일평생 그가 좋아하는 성경구절(로마서 9장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를 암송하며 새벽 묵상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창문을 통해 비추는 그 순간 애국가 악상이 떠올라 마지막 부분과 한국환상곡의 미비한 부분을 완성했다.

뉴욕 대한민국 음악제 제공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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