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 April 2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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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2      이제니

한국환상곡과 안익태 (2)



<지난호에 계속>

화사한 어느 봄날 아침, 독일 작곡가 R.슈트라우스의 집 앞에 그날도 남루한 옷에 악보(한국환상곡)를 옆에 끼고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그는 당시 세계 최고의 작곡가 집 구경만 하는 것도 행복하게 생각했었다) 마침 뜰 안에 유모와 3살된 손녀가 놀다 잠깐 유모가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에 그만 연못에 빠지고 만다. 순간 안익태는 악보를 내던지고 깊은 연못으로 뛰어들어 R.슈트라우스의 손녀를 구했다.

이것이 천운의 기회가 되어 R.슈트라우스의 직계 수제자가 된다. 슈트라우스가 아들같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가 된 안익태는 세계적인 거장들과 이 때부터 교류가 시작된다. 물론 여기에는 각별한 R.슈트라우스의 사랑과 보살핌이 있었다. 때로는 베를린 필 하모닉 정기공연 때 아프다는 핑계로 대신 급히 안익태를 지휘시킨 적도 몇 번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영국 로얄 필하모닉, 멘체스타 심포니, 런던 필하모닉, BBC 방송 오케스트라, 런던심포니, 파리심포니, 로마심포니, 스위스취리히, 부다베스트 교향악단, 로마방송 교향악단, 필라델피아 교향악단, 보스턴 심포니, 신시내티 심포니,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뉴욕필하모닉, 로스앤젤레스 심포니, 비앤나필하모닉 그리고 수십번의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거의 다 지휘하고 다녔다.

세계 거장 안익태가 지휘할 때는 어김없이 꼭 한국말로 된 한국환상곡이 연주되었다. 그 당시 일본정부는 각국에 파견한 외교관들로 하여금 안익태는 일본인이라고 선전하며 또한 노골적으로 한국환상곡을 못하도록 회유와 협박이 들어왔다. 심지어 아사이, 마이니치, 도쿄신문들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지휘자 애키타이 안이라고 선전했다.

1942년 3월 로마심포니 정기연주회 날, 그 날도 어김없이 한국말로 된 한국환상곡과 베토벤 3번 영웅을 지휘하고 있을 때 청중석에서 세계적 지휘자의 음악을 감상하러 무솔리니가 직접 참관했다. 잠시 후 무대 뒤 지휘자실로 하얀 쪽지가 왔다.

“지휘자 귀하! 연주 후에 수상께서 세계적인 지휘자인 당신을 접견하고자 무대 뒤로 갈 것을 미리 통보합니다 – 수상부관으로부터”

잠시 후 무대 뒤로 나타난 무솔리니는 “위대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시여! 오늘 밤 그대의 감동적인 훌륭한 음악회 성공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로마에서의 음악 일정과 행운을 빌겠소”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런 후 며칠 후 지휘자 안익태에게 이탈리아 정부 관계자가 황급히 찾아왔다.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48시간 안에 이탈리아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강력한 항의 각서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신이 연주한 한국환상곡은 항일사항을 고취시키는 것이며, 또한 당신은 일본내란선동혐의로 체포될 수 있으니 제발 빨리 이 곳을 떠나달라는 사정이었다. 그러면서 일본과 동맹한 외교적 관계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간청하였다.

1944년 파리에서의 음악회 때에는 연합군의 치열한 공습 아래 절친한 친구 지휘자 카라얀과 호텔 지하 방공호에서 두 주일간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 베토벤의 논쟁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독일 작곡가의 계보는 바하,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거장 R.슈트라우스로 이어진다고 하는 독일음악과 지휘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카라얀은 베토벤 곡해석은 자기가 정통 독일적자라고 이야기할 때 안익태는 베토벤의 곡해석은 내가 정통이며 내가 적자라고 논쟁을 벌였다. 그만큼 독일 음악계에서는 R.슈트라우스의 직계 제자인 안익태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늘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잘 알려져있는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하계 음악제는 지금도 유명하다.

특히 음악제 때 누가 지휘를 하느냐가 그 시대의 음악계의 최고 인기도를 가늠했다. 이 때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하는데 1944년 6월 하계음악제의 지휘자는 첫날 토스카니니, 둘째날 바인가르트너, 마지막 날 안익태가 지휘했다. 

1936년 8월 1일 독일 나치 정권 아래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안익태는 일본 선수 중 한국인 7명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마라톤 손기정, 남승륭, 농구의 장이진, 염은현, 이성구, 축구의 김용식, 권투의 이규환이었다.

안익태는 동포 몇 명을 모아서 열심히 애국가를 가르쳤다. 마지막 날 메인스타디움 경기장에는 검정, 긴가죽 군화를 신고, 기관단총을 어깨에 메고, 철모를 깊에 눌러 쓴 독일 군인들과 비밀경찰 게슈타포들의 삼엄한 경비와 싸늘한 감시 속에 폐막식 전 올림픽 경기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에 각국 정상과 국가 원수들, 수상 그리고 수많은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진 가운데 대한의 아들 손기정 선수가 1등으로 당당히 뛰어들어왔다. 한참 후 2등 영국의 어네스트 허버, 그리고 거의 동시에 우리의 남승룡 선수가 조금도 피곤함 없이 씩씩하게 3등으로 들어왔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안익태는 품 속에 있는 태극기를 꺼내 동포 몇 명과 힘차게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불렀다. 눈에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1955년 2월 19일 조국을 떠난지 25년만에 이승만 박사 80회 탄신축제를 위한 특별초청이었다. 

서울 도착 후 경무대를 방문한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은 빨리 조국에 들어와서 음악 발전에 힘써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음악계에서는 질투와 질시의 눈으로 모함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쌓아놓은 음악 입지가 흔들릴 것을 생각하고 노골적으로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하였다. 

1960년 3월 23일-24일, 이화여대 강당에서의 연주였다.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립 교향악단 연합으로 연주 전날까지 연습했던 베토벤 5번 ‘운명’ 악보가 연주 당일날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드보르작의 9번 ‘신세계’ 교향곡으로 급히 대체했다. 물론 한번도 리허설이 없는 초견 연주회였다.

도저히 일반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잃어버린 악보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발견되었다. KBS 단원 바순 연주자가 윗사람의 지시로 책방에 악보를 팔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안익태는 개의치 않고 그 후에도 봄이면 꿈에도 못잊을 조국에 돌아와 영구 귀국할 것을 희망했으나 반대자들에 의해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비행기에 오르면서 배웅 나온 몇몇 친지들에게 고뇌에 찬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조국이여! 내 동포여! 왜 나를 이렇게 홀대하십니까? 외국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고 그러십니까? 아니면 애국가를 잘못지었다고 꾸짖는 겁니까?”

코리아 환타지를 품에 안고 전 세계를 누비며 꼭 한국말로 고집하며 지위한 지휘자 안익태, 세계 곳곳에서 우리 조국과 민족의 혼을 앞세우던 안익태, 그러나 그의 조국은 끝내 그를 외면했고 이역만리에서 그는 그렇게 쓸쓸히 영원한 나라로 떠나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를 우리에게 남기고….

<끝>

뉴욕 대한민국 음악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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