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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여왕은 왜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리나?

01/26/21       정부홍 목사

메리여왕은 왜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리나?


영국 최초의 여왕이자 ‘메리’란 이름을 가진 첫 여왕, 메리 1세(1516-1553.1558)는 본명이 ‘메리 튜더’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와 첫부인, 아라곤(15세기 말 스페인에 합병) 출신의 캐서린(1486-1538) 사이의 여섯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 남은 외동딸이었다. 메리는 헨리8세가 친 여동생 이름을 따서 붙일 정도로 귀여움을 받았다. 메리는 왕궁에서 프랑스어 춤 음악 미술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잘 자랐으나 어머니가 왕비에서 강등되면서 공주에서 서녀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처형 당할 위기도 여러 번 넘겼다. 그 후 아버지인 헨리 8세가 다섯 번의 재혼을 거듭하면서 고단한 성장과정을 거치는 동안 메리는 비뚤어지고 억압받아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받은 충격으로 메리는 자주 병치레를 하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결국 메리는 어머니 캐서린의 과오를 억지로 인정하고 공주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한편, 헨리8세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낳은 아들, 에드워즈6세(1537-1547-1553)는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국회를 통해 모든 주교들에게 교회의 성상들을 제거하고 복음서와 사도서신들을 영어로 봉독할 것을 지시했다. 로마 카톨릭 전통을 없애려는 시도였다. 6명의 부인을 둘 정도로 문란한 결혼생활을 했던 헨리 8세는 반카톨릭적 정치로 영국의 본격적 종교개혁의 서막을 올렸고 그 아들 에드워즈6세는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크게 수립시켰다. 메리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이런 국법을 어기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서 몰래 카톨릭 미사를 드렸다. 이를 알게 된 에드워드 6세는 메리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했고, 메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에드워즈 6세는 15세에 폐결핵으로 죽으면서 배 다른 사촌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인 제인 그레이(Jane Grey)를 여왕으로 추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1553년 7월 10일, 여왕이 된 제인은 메리의 음모로 9일만에 참수되고 메리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여왕이 된 메리는 에드워즈 6세에 대한 반감으로 국교를 로만카톨릭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이에 신교를 지지하던 신흥 귀족층과 개신교 청교도들이 반발하자 메리 1세는 주교들과 청교도들 300명 이상을 이단자로 몰아 처형시켰다.  

메리 1세에 의한 최초의 순교자는 성경 번역가 존 로저스(John Rogers)였다. 그는 런던에서 교황 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하였다. 집행관이 뜻을 철회하면 살려 주겠다고 회유하자 로저스는 “나의 피는 내가 한 설교의 보증물이오.”라고 말했다. 집행관이 “당신은 이단자요!”요 하고 정죄하는 말에는 “주님의 심판 날에 다 알게 될 것이오.”라고 응수했으며 “좋아요. 난 당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거요.”라는 말에는 “그렇지만 난 당신을 위해 기도 드리겠어요.”라고 응답했다. 로저스는 갓난 아이를 품에 안은 아내와 열 한 명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시편 찬송을 불렀다. 존 폭스가 기록하기를, “이 슬픈 장면은 결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못했고 그는 조용히 스미스필드로 끌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타 재로 사라졌다.” 

그리고 파리와 스트라스버그로 두 차례 피신하며 칼빈주의를 표방했던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 주교는 예배 때 로만 카톨릭교 제복을 입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화형 당했다. 그리고 화형식에서 장작더미에 불이 잘 붙지 않아 한 시간동안이나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 제발 부채질이라도 하여 속히 죽어 고통을 면케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 국교회 주교이자 교수인 휴 래티머 (Hugh Latimer)와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es)도 화형장에 끌려왔다. *<불이 붙은 장작더미가 리들리 박사의 발등에 쏟아졌다. 래티머는 말하기를, “리들리 선생님, 깊은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분(주 예수)의 역할을 해주세요. 우리는 오늘 영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촛불이 되어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그 후 불이 타 오르자 래티머는 질식해 곧 죽었지만 가여운 리들리는 운 나쁘게도 발에 붙은 불이 격렬하게 타올라 괴로워하며 부르짖었다.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고통이 끝나도록, 불이 속히 내게 덮치게 해 주세요. 나는 스스로 불탈 수 없습니다.”라고 반복하며 외쳤다.> 

*Josiah Pratt, The Church Historians of England: Reformation Period, THE ACTS AND MONUMENTS OF JOHN FOXE.”, VOL. VII., 550.

 

메리는 자기 어머니의 이혼에 동조했던 토마스 크램머 대주교를 자신의 한풀이로 1554년에 처형시켰다. 처형당하는동료 순교자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6번이나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나 마지막엔 양심선언을 하고 담대히 화형 당하며 철회할 때 들었던 오른 손을 먼저 불에 넣으며, “주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부르짖으면서 숨졌다.  

메리가 난소암으로 즉위 5년만에 죽었지만 그 때에 약 신교도 8 천명이 유럽 각지로 특히 바젤, 쥬리히로 망명을 떠났다.

결국 그녀를 지지했던 국민들은 이 잔인한 박해로 실망하고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녀를 피의 메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메리는 자신의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1세에게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나 거부하였고 또 자신은 스페인 왕자 펠리페2세와 결혼함으로써 영국이 스페인의 통치에 놓이게 될 위험성에 대한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1556년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을 도우러 파병하였으나 패전당하고 영국령 칼레 까지 프랑스에게 빼았겨 국운이 기울자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메리가 취한 화형은 그 동안 시행되었던 이단자들을 처형하는 전형적 방식이었다. 당시에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에 악영향을 끼치며 사회 전체에 해로우니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벌은 죽음뿐 아니라 시체가 숭배받지 못하도록 불에 태워 그 재를 강에 던졌다.  

메리가 죽은지 5년 후에 저명한 순교사가 존 폭스(John Foxe, martyrologist, 1516–1587)가 순교자들에 대한 자세한 화보를 출판하였는데 후임 여왕 엘리자베스에 의해 각 교회와 가정에 비치하도록 지시내려졌다. 17세기말에는 축소판이 나오고 폭악 군주들은 수거하여 소각시켰지만 영국종교개혁의 계속적인 불씨 역할을 했다.  

오늘날도 참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피를 흘리며 순교당하는 중이다.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피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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