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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21      기독

기행문 - 플리머스 청교도 유적지를 방문하고 나서



플리머스 청교도 유적지 탐방이 뉴욕기독교방송(CBSN‧사장 문석진목사) 주관으로 8월23일(월)과 24일(화) 이틀간 열렸다. 이번 탐방은 코로나19로 지친 목회자들의 휴식과 회복 및 묵상을 위한 취지로 플리머스 Plantation, 청교도 무덤, 메이플라워 2호, 플리머스 락, 보스톤 다운타운 퀸시 마켓, 바다를 따라 산책하는 절벽 산책코스 클리프 워크, 뉴포트 다운타운, 홍해처럼 갈라지는 모세의 섬 방문 등의 일정으로 총 43명이 참가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1620년 11월 20일 “Mayflower(메이 플라워호)(180톤급 목선)을 타고 미국 동북부 “Plymoth(플리머스)”에 상륙하여 토인들의 협조를 받아 다음해에 농사를 짓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을 계기로 미국 국경일로 감사절을 기키게 되어 전세계가 다 감사주일을 지키게 된 것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라는 정도로 알고 추수감사절때마다 플리머스라는 곳을 기억하게 하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CBSN주최로 “플리머스 청교도 유적지 탐방”을 계기로 더욱 실감나는 자세한 내용을 알수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Mayflower호라는 배는 크지 않은 배인데도 불구하고 이민자 102명과 승무원 30명정도를 합쳐 130명이 승선했는데 그중에 35명만이 청교도 였다고 한다. 1620년 9월 16일 영국을 출발하여 10주 동안 바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1620년 11월 20일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신대륙으로 도착을 했으나 그들은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채 살아남아야 했다. 겨울 동안 승객들은 괴혈병, 폐렴 및 결핵 이 혼합된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메이플라워호에 남아 있었다. 그 후 절반이 조금넘는 53명의 승객만이 남았다. 승무원의 절반도 사망했다. 봄에 그들은 해안에 오두막을 짓고 승객들은 1621 년 3월 31일에 메이플라워에서 내렸다 그 결과 최초의 순례자 중 절반만이 플리머스에서 첫 겨울을 보냈다. 지역 원주민의 도움 없이 식량 수집 및 기타 생존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모든 식민지 주민들이 죽었을 것이다. 이듬해 1621년 순례자(메이플라워 정착민들)들이 원주민과 함께 식민지의 첫 가을 수확을 기념하는 기도행사와 만찬행사로 지킨 것에서 유래하여 최초의 추수감사절로 선언된 미국의 공휴일이 된 것이다. 

추수감사절의 메뉴로는 인디안 옥수수, 보리, 콩, Barley and 완두콩, 가금류(칠면조+오리), 사슴 5마리가 있었고, 여러 레크리에이션들, 총 사격 행사, 90명의 인디언들과 추장(마사소이트 왕)과는 3일 동안 즐거워 하고 잔치했다. 이 추수감사절에는 첫째 잘 키워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둘째 특별한 방식으로 즐거워 했다. 셋째 이 정도로 풍성한 것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다. 넷째 가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공포 했다. 다섯째, 불쌍한 인디안들을 이해 했다라고 신앙적이며 종교적으로 치루어진 행사라고 했다.

바로 그 순례자들이 살았던 Plimoth Patuxet Museums을 방문하여 그들이 살았던 집과 어떻게 불을 피우고 살았는지, 집안 살림은 어떻게 이루고 살았는지를 현실감 있게 볼 수가 있었고 원주민 옷을 입고 있는 분들과 사진도 찍을수 있었다. 

청교도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영국은 로마 카톨릭 국가였다. 청교도란 영국 헨리 8세(Henry VIII,1491-1547)때 케임브리지대학의 종교개혁적 교수 윌리엄틴데일(Tyndale 1494-1536)과 토마스빌니(Thomas Bilny 1495-1531)의 사상이 영국에 뿌려져 청교도 운동의 싹이 나기 시작 했으나 헨리8세의 교권에 반한다고 보아 화형시켰다. 

1540년 토마스크롬웰(Cromwell)이 이단이라고 처형 되었다. 헨리8세가 셋째 부인에게서 낳았던 독자 에드워즈6세가 8세에 왕위에 오르고 외삼촌 벌레이경(Sir Burleigh)이 섭정하면서 종교개혁의 서광이 비쳤다.

마틴부쳐의 성직자독신폐지, 미사폐지, 존후퍼의 교회당의 성화철거, 성직자의 복장 폐지, 논녹스의 영국 왕궁목사를 역임 했으나 6년만에 헤드워드 6세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헨리8세의 첫부인 메리(Bolldy Mary 1516-1553-1558)여왕이 등극하여 신교도들을 박해하고, 276명을 처형하고 고통을 더해 주려고 일부러 젖은 장작을 사용하여 몇 시간씩 타게 했다고 한다.

그 당시 8천여명의 개신교도들이 화란, 바젤, 쥬리히, 제네바로 망명을 떠났다. 5년 통치후 에드워드 6세가 전염병으로 죽자, 헨리8세의 둘재 부인 앤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한다.  청교도운동이 일어나니 대주교 매튜 파커(Matthew Parker)를 임명하고 청교도를 박해하라 하고 많은 목사를 투옥, 성직박탈하여 대륙으로 피신 했다. 매튜파커 사후에 에드먼드 그린달(Edmund Grindal, 1519-83)을 대주교로 임명 하였으나 설교장려, 목사교육향상, 탄압 명령을 거부하여 대주교권을 박탈 당하고, 존 윗기프트(John Whitgift), 존 에일머(John Ay.mer)등이 주교로 임명되어 청교도를 박해했다.

그러한 박해중에도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th, 1535-1603)의 장로교주의(Presbyterianism), 로버트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의 분리파, 회중파들의 활동이 있었으나 헨리 8세왕이 교회의 권위를 부인하고 로마교회를 영국의 국가교회로 탈바꿈한 1535년에 청교도주의(Puritanism)가 시작 되었다. 영국의 감독들이 기도서와 의식들, 그리고 교회의 규율에 서명 하도록 강조하자 거부한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낙인 찍었다. 

대주교 파크(Archbishop Parker)는 개혁파들에 대해서 경멸하여 청교도(Puritans), 정교파(Precisians), 장로파(Presbyterian)의 닉네임을 붙였다. 그 이후에 청교도들은 더 성장하여 반대파(Dissenters), 분리파(Separatists), 브라운파(Browinsts or Barrowists)로 성장했다. 이전에는 Puritan은 교회에서 치리하고 다스리는 계급에 반대하는 자를 가리키는 데만 사용 되었는데, 이제는 반알미니안주의자(Anti-Arminiam)와 같은 브랜드로 확대 되었다. 

그 후에 로마카톨릭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라고 하여 로버트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 at Cambridge)은 국교와 분리하여 회중교회를 시작하여 화란으로 이주하여 브라운니스트(Brownist)의 원조가 되었다. 후랜시스 존슨(Francis Johnson, 1563-1618), 헨리 바로우(Henry Barrow, 1550-1593), 존 그린우드(John Greenwood, 1556-1593), 존 로빈슨, 윌리암 브루스터장로, 에드워드 윈슬로 부목사등의 분리주의자들의 등장이 있었다.

왜 순례자들이 실제로 미국으로 오기로 했을까? 영국에서의 “반기독교 속박의 멍에”를 벗어나 종교적 자유를 찾아서(In Search of Religious Freedom), 특히 인쇄업을 한 윈슬로우는 모두 영국과 제임스가 체포조를 화란으로 보내어 체포 하였으나 화란당국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 했다고 둘러 댐으로 풀려나게 되었으나 여전히 자유가 없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그 같은 자유(The Like Liberty)를 온전히 얻기 바라고, 더 나은 안락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를 바랬고, 자녀들의 타락과 변질을 막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기초돌과 디딤돌이 되기 위하여 미국으로 오기로 했다. 뉴잉글랜드의 기초(Foundation) 는 “체제, 분립, 분리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 평화, 거룩에 있다” 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카드 항구에서 메이플라워 합의문을 만들고 서명한 후에 정박을 하게 되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대영제국, 프랑스 및 북아일랜드의 주권자, 국왕, 신앙의 수호자,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숭배하는 군주인 국왕 제임스 1세의 충실한 신민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종(Servants), 대사이다. 셋째, 우리는 새민주국가의 시민(A Civil body politic)이다. 라고 했으며 서로에게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체결하며, 우리 스스로 민간 정치체제를 결성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을 제정하여 우리 식민지의 총체적인 이익을 위해 식민지의 사정에 가장 잘 맞다고 생각되는 정당하고 평등한 법률, 조례, 법, 헌법이나 직책을 만들어 우리 모두 당연히 복종과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라고 했다.

존 프랜시스 하일런 뉴욕 시장은 연설에서 순례자의 메이플라워 협약의 원칙이 미국 독립 선언의 선구자라고 말했다. 미국 역사가 조지 밴크로프트는 이를 '헌법적 자유의 탄생'이라고 불렀다. 캘빈 쿨리지 주지사 마찬가지로 협정의 형성을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했다.

또한 인상 깊은 것은 존 하울랜드(John Howland)라는 청년에 관한 것이다. 메이플라워를 타고 항해 하는중에 폭풍우가 심하여 한 청년이 갑판에서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어 던져준 줄을 잡고 끌어 올려져 살게 되었다. 그는 John Tilley 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딸 6명과 아들 4명, 손주 77명을 두게 되었다. 그 후손 중에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제럴드 포드 대통령, 윈스턴 처칠, 조지부시 대통령의 조상이 되었다.

“존 하울랜드는 경건한 사람이자 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던 변함 없었던 신앙고백자 였습니다. 그는 이 땅에 개척자들 중 하나였으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온 사람들 중 끝까지 플리머스에 남았던 마지막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래 살면서, 교회와 연방 공동체 모두에서 유익을 끼치는 회원이 되었습니다” 라고 주지사 브레드포드가 평가 하였다. John Howland는 1672년 2월 23일 80세에 사망 했는데 가장 오래 산 순례자였다.

여기에서 얻을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물속에서 다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오직 구원자 돛줄과 하나님만 붙잡았다.(계 3:11) 그리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어 올려주어서 살았다.

2. 당신 자신의 라이프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금은 잘 모른다. 이 한 사람이 살아나 약 2백만명의 후손을 이루었다고 함.

3.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더 위대한 후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이다.

4. 현재 처한 고난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가 처한 것 보다 절박하랴. 어려운 현재의 고난을 참으라(롬 8:17)

5. 끝까지 남는자 되라.

즉 나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귀한 순간이었다. 나 하나쯤이야 하면서 자신을 아무런 존재 가치를 모르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 하시면 존 하울랜드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수 많은 후손들을 배출하여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존 하울랜드(John Howland)와 순례자들이 묻혀있는 Burial Hill Cemetery에 들러 그 옛날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찾아온 분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헤아리며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다짐을 하는 시간을 가지며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 순서로 메이플라워 2호가 있는 배에 올라 이 작은 배에 130명이 타고 온 것을 생각하며 얼마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신대륙을 찾은 분들의 투철한 신앙심에 저절로 탄복이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Plymoth rock이 있는곳에 왔다. 이곳에 처음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을 기념하여 만든 돌위에 1620이라고 씌여 있었다. 조그만 배가 먼저 들어와서 보트가 착륙한 곳이라고 한다.

사진촬영을 한 후에 제분소 즉 방앗간에 들렀으나 관람시간이 지난 후라서 밖에서 창문을 통해서 보았고 그 방아를 돌리는 큰 물레방아가 밖에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저녁식사를 위하여 보스톤에서 유명한 Quincy Market에 들러 여러나라 음식점이 있는 곳에서 그룹별로 좋아하는 음식을 사서 먹게 되었다. 참으로 특이한 웅장한 건물을 지어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Shopping 도 하고 식사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한 후에 호텔에 가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폭풍으로 인하여 빗속에서 있을줄 알았다가 너무나도 청명한 날씨를 허락 하셔서 모두들 기쁜 마음이 되었다.

둘째날에는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Hearling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로드아일랜드주에 있는 Newport Cliff Walk 로 가기로 했다. Pacific Ocean이 펼쳐진 바다가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바닷가로 와서 즐기며 한 쪽에서는 서핑도 즐기고 있었다.  산과 절벽과 바다로 이루어진 사이길을 만들어 놓아 걸을 수 있게 했는데 오른쪽에는 유명한 별장들이 그림처럼 세워져 있었고, 왼쪽에는 낭떠러지로 되어 있고, 그 밑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태평양의 바다가 있는 길이었다. 날씨가 더운데도 열심히 감상하며 걸었다. 중간 쯤에서는 기타 치는 외국 아저씨와 'Amazing Grace'를 찬양하는 시간도 가졌다. 땀도 많이 흘리며 큰 운동을 한 것 같이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 곳을 떠나 가까이에 있는 해변가 식당에서 흩어져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바다쪽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랍스터고기가 섞인 빵과, Buger를 주문하여 색다른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제 출발을 해야 하는데 Silver Sand State Park를 들렀다 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사를 물어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2시간 이상을 타고 Part에 도착 했는데 예상 했던 것보다 너무나 좋은 장소였다. 모세의 기적과 같은 썰물이 될 때 길이 만들어져 조금 떨어져 있는 섬까지 걸어 갈수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 했을때는 3분의 1정도는 걸어서 갈수가 있었다. 그러나 위험하기에 끝까지는 못가고 사진촬영만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모두들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장소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청교도 유적지를 방문 하면서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온 것은 참으로 존경할 수 밖에 없는 대 이동이었다. 추운겨울에 먹을것이 없어 46명이 굶어 죽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불쌍한 생각이 그지 없었다. 그들의 순수한 신앙의 기초로 세워진 이 미국나라가 지금처럼 타락한 것을 보면 얼마나 아쉬운 마음일까? 라고 생각하니 우리가 할 일이 더 많아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로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지금의 현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여 지옥에 가는 사람 없이 하늘나라에 올라 갈수 있도록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펼쳐야 청교도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 땅에 깊이 뿌리 박아서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고 더욱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다.

태풍 '헨리'의 폭풍을 뚫고 다녀온 여행이라서 그런지 더욱 활기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청명한 날씨를 주신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뻤다.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다녀올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다음에 또 멋진 여행을 기약하며 모두들 집으로 향했다. 참으로 공부를 많이 하는 뜻깊은 여행이었으며 이러한 귀한 여행을 기획하시고 준비해 주시고 안내해 주신 CBSN 방송국 사장이신 문석진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의회 회장 이진아 목사

(참고자료 정부홍박사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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